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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 증상 - 인과응보, 사필귀정, 권선징악에 대한 집착

Winnipeg101 LV 10 22-11-21 178

한국인들은 인과응보/사필귀정/권선징악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집착의 양상은 대략 이렇다. 

인과응보/사필귀정/권선징악을 맹신하고 선망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본인이 보기에 실제 현실이 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면서 주변을 과도하게 감시 및 검열한다.

그리고 정반대의 감정(회의와 경멸)이 올라올 때마다 이를 억누르기 위한 인지부조화 메커니즘을 발동시키거나, 투사하기 위한 희생양을 찾거나, 전이시키기 위한 살풀이 행위를 한다. 

착한 일을 하거나 효도를 하면 어디에선가 산신령이나 옥황상제가 나타나 비현실적인 보상을 턱 하니 안겨주는 한국의 수많은 전래동화 구조가 어릴 때부터 한국인들을 세뇌시켜왔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인과응보/사필귀정/권선징악에 대한 집착은 얼핏 도덕성이나 정의감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국인의 멘탈을 무너뜨리는 정신적 최약점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많은 악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과응보,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에 대한 집착이 정신에 해로운 이유는

첫번째, 세상은 도덕적 인과관계가 아닌 물리적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고,
두번째, 선악 기준은 주관적이며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인과관계에 따라 결론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는 모두 누군가가 직접 행동한 결과이거나 이미 수립된 사회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이지, 하늘의 신묘한 작용에 의해 일어난 기적이 아니다.

누군가 직접 움직여 물리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 어떤 숭고한 가치라 해도 절대 저절로 발현되지는 않는다.

결국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 신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종의 사이비 종교인 것이다.

인과응보에 대한 집착이 정신에 문제를 일으키는 양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상황판단력이 떨어진다.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현상에 대한 원인 분석이 비합리적이며, 결과론적 해석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본인의 인과응보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는 현상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가정에 장애가 있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덮어놓고 그 부모가 뭘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장애 발생은 생물학과 통계학으로 설명할 일이지, 도덕적으로 설명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과응보 신봉자들은 어떻게든 이를 도덕적 문제로 끼워맞추기 위해 증명이 되지 않는 메커니즘에 집중한다.

당연히 상황에 대한 분석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2. 문제 해결 능력도 떨어진다.

인과응보는 기본적으로 미신적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 신봉자들은 인생에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108배나 새벽 기도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유형의 종교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원인 분석이 잘못되었으니 해결책 역시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자아가 위축되어 있는 경우에는 내삽이 심해져 자기 잘못도 아닌 일을 자기 잘못으로 자처해 쓸데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만고에 쓸데없는 자학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문제의 원인을 본인의 존재나 정체성에서 찾으니 스스로를 고문하고 괴롭혀야 하늘의 용서(?)를 받아 일이 해결될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자아가 비대한 나르시시스트의 경우에는 반대로 외부 투사가 강해져 모든 원인과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원인 분석보다는 본인의 면책이 중요하기 때문에 떠넘기는 대상 선정도 매우 비논리적이다. 동대문에서 뺨 맞고 서대문에서 화풀이하는 경우가 흔하다.

매우 다른 양상으로 보이지만 두 경우 모두 정작 해야 할 일,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내팽개치고 엉뚱한 부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본인이 해결할 생각은 없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든 벼락이 내려오든 해야 된다는 식이다.

당연히 문제 해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3. 주체성이 훼손된다.

인과응보/사필귀정/권선징악 세계관은 어떤 현상을 직접적 행동의 결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주체적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또한 어떤 신묘한 존재나 에너지가 자신을 늘 감시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의 자연스러운 생각이나 감정을 억누르는 경향도 강해진다.

이것은 개인적 불행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주체성 약화는 한국적 통념과 다르게 사람을 부도덕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혼자 있어도 어딘가에 달려 있는 CCTV로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은 일종의 공포이다.

한국인들은 이런 식으로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내면화하면 바르게 살게 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표면상으로 들키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성향만 키울 뿐이다.

외부의 상벌이 행동의 동기가 될수록 주체성은 더욱 크게 약화되고, 

이렇게 주체적인 사고 능력이 마비된 이들은 사실상 악한 충동에 더 잘 빠지고 이를 억제하지 못한다.

자기 통제는 주체적 사고 능력 없이는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과응보 세계관의 소유자들은 본인이 엄연히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해놓고도 스스로의 의사결정 책임과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해놓고도 유체이탈식으로 이를 신의 뜻, 세상의 순리, 자연의 법칙 따위로 설명한다.

불가피하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양반 수준이고, 

심지어 본인의 악행이 자신보다 더 악한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하늘이 허용한 일종의 처벌 도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자기통제보다 해석 왜곡이 훨씬 더 쉽고 편한 길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궤변이지만 이미 주체적 사고력이 약화된 미신론자들은 본인의 궤변이나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아무 잘못도 없었던 김보름 선수나 한강 만취 실족남 사건의 술자리 친구 등을 인터넷에서 마녀사냥한 대중의 사례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냥의 참여자들은 사실은 모종의 사적인 이유로 살풀이를 한 것이지만 이를 스스로 인정할 수 없어, 사건을 겉으로만 그럴싸한 인과응보로 포장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인과응보를 믿는다지만 사실 절대자가 생각하는 도덕적 기준이라는 게 무엇인지 밝혀진 적이 없고, 내면의 도덕성이라는 게 겉으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덕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스스로와 남을 속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결과적으로 인과응보 세계관은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한 위선자로 만들 가능성이 훨씬 크다.


4. 자신의 가치관이 절대적 도덕 기준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사실 인과응보/사필귀정/권선징악을 맹신하는 사고방식은 애초부터 치명적인 악덕의 씨앗을 품고 있는데, 바로 '나는 절대적으로 선하다', '나의 도덕 기준이 절대적으로 옳다'라는 오만한 전제이다.

본인이 스스로 선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 인과응보 세계관을 지지하거나 믿고 싶을 리가 없다. 

본인이 옳다는 오만한 생각이 기본 전제로 깔리는 데다 기준이 자꾸 바뀌면 점수를 매길 수가 없기 때문에,

인과응보/사필귀정/권선징악을 믿을수록 본인이 가진 특정 도덕 기준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또한 본인이 오랜 기간 그런 식으로 특정 가치에 복종하다보면 사적인 집착까지 생긴다. 본인이 열심히 따놓은 포인트를 무효로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적인 집착은 사람의 정서를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몰고 가는 한편, 

사상적으로는 변화와 발전이 불가능한 완고한 존재로 만든다.

여러 합당한 이유로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수정하거나 유연화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본인이 믿는 가치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이를 본인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사적인 원한과 앙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지구상에는 인간이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는 영역도 제한적으로나마 존재하는데 바로 고전역학의 세계이다.

부뚜막의 소금을 넣으면 짜고 넣지 않으면 싱거운 이 세계의 원리는 누구나 노력만 하면 이해할 수 있고 내가 하는대로 결과가 보장되는 축복의 세계이다.

선조대의 천재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이 세계를 조금씩 넓히고 확보해 온 것이 바로 인류 문명의 역사이며, 

본인이 정말 정직한 인과응보로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싶으면 이 영역의 원리에 따라 살면 된다.

완벽하게 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최대한 물리적인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들로만 인생을 채우면 된다.

건강해지고 싶으면 ‘인명은 재천’ 타령 대신 운동과 식이 관리를 하고, 

사회가 잘못되었다 싶으면 감정적 희생양을 찾는 대신 어디가 문제인지 실제적으로 분석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100% 결과가 보장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나마 가장 문제 해결 확률이 있는 방법이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행동을 하면 꼭 내가 원하는 결과 수준은 아닐지라도 모종의 결과는 나올 수밖에 없다.

고전역학의 법칙은 배신하는 법이 없다. 
운동과 식이 관리를 한다고 100세 넘어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40세에 죽을 사람이 50세까지 수명이 늘어날 수는 있다.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사는 동안 훨씬 높은 삶의 질로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원하는 만큼, 원하는 종류의 결과는 아니라도 결과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세계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별 관심을 받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판타지 매트릭스를 구축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를 배반하는 현실을 증오하고, 견딜 수 없을 때마다 희생양을 찾아 인신공양을 한다.


아마도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말과는 달리 본인이 하는대로 결과를 받는 진짜 인과응보가 아닌, 본인 입맛대로 모에화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인과응보 가산점’을 받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정량적 스펙과 달리 증명도 안 되고 보이지도 않는 모호한 ‘도덕적 가치’를 스펙화하면, 일단 본인이 거기에서 백만점이니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이라도 해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착하게 살았는데 왜 부뚜막의 소금이 저절로 쳐지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발버둥치며 울부짖는 게 버릇이 되면 종국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착하게 산 것은 착하게 산 것이고, 부뚜막의 소금도 쳐야 짠 것은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다. 
둘 사이에는 인과관계는 물론이고 상관관계조차도 없다.

도덕적인 가치는 그 자체로 유의미해야 하는 것이지 대가가 약속되는 계약 상품이 아니다.

독립적인 사안을 나만의 세계관으로 마구 엮어서 거래로 만들어놓고, 도덕 '포인트'를 쌓아 산신령에게 금도끼를 하사받겠다는 야무진 인생 계획은 당신을 정신병자 또는 빌런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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