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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다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Winnipeg101 LV 10 22-11-24 237

위 구절은 <손자병법>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일 것이다. 13편 중 세번째, 모공(謨攻) 편에 나온다. 대개, 이긴다고 하는데 이기는 게 아니라 굴복시키는 것이다. 승(勝)과 굴(屈)은 다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역시, 백번 이긴다가 아니라 위태롭지 않다(百戰不殆)이다. 손자는 바로 위 구절에 “백전백승이 최선은 아니다”고 말한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상호 출혈이 많기 때문이다. 온전한 승리(勝乃可全)의 조건은 지형(地形) 편에 다시 언급된다.
 

<손자병법>은 군사학(軍事學)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군사학은 여성학, 지역학, 문화연구처럼 간(間)학문, 다(多)학제 학문이다. 얕은 경험이지만 이 매력적인 숲에서 길을 잃고 본래 목적을 잊은 채(찾아야 할 책은 안 찾고) 도서관에 주저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모공’은 글자 그대로 전략과 공격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물리력보다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적을 멸(滅)하는 것만이 승리가 아니다. 상대를 상하게 하지 않고 항복을 받아내는 장수가 명장이다.
 

<손자병법>은 리더십, 인간관계, 삶의 지혜 등으로 널리 읽히지만 나는 평화학으로 읽는다. “오래 끄는 싸움은 좋지 않다(兵貴勝不貴久)”(작전 편). 그는 이기는 것만큼 병사를 소중히 여겼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지금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내가 경험한 리더들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들은 언제나 <손자병법>을 읽는다고 말한다.

 

흔히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비교되면서 동양고전의 ‘우월성’을 말하지만(내가 읽기에도 그렇지만) 역사적 맥락의 차이가 있다. 손자는 2500여년 전 중국 춘추시대 말, 오나라 때 인물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 <전쟁론>이 다루고 있는 전쟁은 근대국가 출범 이후의 전면전을 말한다. 이전 시대의 전쟁은 부분 전쟁(limited war)이었다. 단순 비교가 불가능하다.
 

굴복(屈伏), 허리를 엎드리고 무릎을 꿇다. 신체적 비유가 불편하긴 하지만 “싸우지 않고 굴복시킨다”는 약자에게 유리한 전략이다. 권력과 자원, 물리력 모든 면에서 열세인 약자는 머리를 쓰는 수밖에 없다. 전략, 논리, 나아가 인간적 감화로 상대방을 자기모순에 빠뜨리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 당연하게 설정하고 있던 전선(戰線)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기존의 사고방식, 싸움 주제를 생소한 것으로 만들어 적을 인식 분열(‘멘붕’) 상태로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 약자는 자신이 약자라는 인식과 더불어 자각이 다른 앎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약자의 인식론적 특권이다. 강자는 자기 생각을 약자에게 투사하지만, 똑똑한 약자는 두 가지 이상의 시각에서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파악한다.

 

전선을 구획하는 자가 이긴다. 누가 먼저 어떤 선을 긋느냐. 생각하는 방법을 창조하느냐. 기존 전선에 걸려 넘어질 것인가, 내가 룰을 만들 것인가. “다르게 생각하라”. 강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양극화를 만들고, 약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을 이롭게 한다. 기존의 틀에서는 아무리 좋은 전략도 필패다. 내가 ‘쉽고 익숙한’ 말을 경계하는 이유다.

 

나는 양성평등을 주장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랑 평등해지는 것을 수치로 생각한다. 여성이 남성과 평등해지려면 이중노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평등인가? 다문화 가정의 한국 사회 적응? 왜 그들이 우리에게 동화되어야 하는가. 한국은 가만히 있어도 되는 제정신인 사회인가. 권김현영과 서동진의 지적대로, 자본은 자기가 100%(보편)라고 주장하는데 왜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99%라고 정의하는가?

 

완전한 승리는 적의 언어를 통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표현할 언어(생각)가 없는 것이다. ‘일베’와 ‘할 말은 하는 신문’이 만끽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표현의 권력이다.

 

나의 진짜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발상의 전환으로 매복하고 있어야 한다. 쉽지 않다. 여성은 ‘적’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은 ‘적’처럼 살고 싶어 한다. 탈식민 병법이 필요하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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