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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 불안한 실존. 죽음의 충동.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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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입력 2021.11.30 07:59

수정 2021.11.30 11:48

 

 

정신과 의사와 함께 보는 넷플릭스

[정신의학신문 :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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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은 비인간화로 가득 차 있다.     

참가자들은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린다. 주최 측은 심지어 얼굴마저 가리고 도형으로 구분된다. 얼굴을 드러내기만 해도 사살당한다. 게임을 내려다보는 VIP 들 역시 짐승의 가면을 쓴 채 참가자들을 바라보며 짐승들의 본능을 운운한다. 그곳은 존재에서 인격과 자아를 지워버리고자 하는 비인간화의 온상이다. 서로가 서로의 관계를 차단하고, 인간으로서의 격을 지워버리는 공간이다.     

 

그곳은 죽음의 공간이다. 사람과 시체의 구분이 어렵다. 무수히 쏟아지는 시체들은 장작처럼 불태워지고, 살아있는 사람은 체스판의 말처럼 매매와 투기의 대상이 된다. 인간으로서, 의식과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의 숙명이 그곳에서는 철저히 배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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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곳에서는 인생의 고된 숙명을 벗을 수 있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누군가에게 빚져야만 존재할 수 있는 무거운 굴레와 고된 의무가 그곳에는 없다. 모두가 그저 돌멩이처럼 굴러 다닐 따름이다. 애초에 그들 모두 그 고된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내쫓기듯 흘러온 이들이다.     

 

그곳은 끔찍하지만 자유롭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남편, 형제, 친구로서 존재해야만 하던 불안이 그곳에는 없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이야기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강박이 그곳에는 없다.      

 

죽느냐 사느냐. 그곳에서는 달고나 뽑기와 줄다리기, 총탄과 칼부림이라는 생존 주제만이 존재를 논할 수 있다. 돌멩이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사물이 되고자 하던 모두의 무의식적 열망이 그곳에서는 핏빛 환상으로 실현된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의식적 존재로서의 고된 불안을 벗어던질 수 있다. 모두가 약육강식과 요행으로 살아가는 존재, 사물과 짐승의 존재로 추락한다.          

사진_넷플릭스 '오징어게임'
사진_넷플릭스 '오징어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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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등장인물들은 그곳에서 다시 누군가와의 관계를 찾기 시작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지치고 버려져 그곳에 굴러 떨어진 이들이 다시 그곳에서 서로 엉겨 붙기 시작한다. 도형과 번호로 비인간화된 기표들에서 탈출하려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참가자들은 서로 적대할 뿐 아니라 연대한다. 단지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것뿐이 아니라 서로를 믿고 지켜주고 도와주기도 한다. 상대를 속이고 이용하기만 할 뿐이 아니라, 스스로를 희생하며 상대에게 손을 내밀기도 한다.

 

참가자들은 점차 번호가 아닌 이름을 나눈다. 유니폼을 서로 나눠 입는다. 그렇게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인격을, 서로의 자아를 되찾아간다.

 

게다가 이 아이러니한 회귀는 게임 속 계층과 직위를 막론하고 확인할 수 있다. 핑크색 유니폼의 병정도 가면을 벗으며 "봐, 나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야"라며 절규한다. 무시무시한 프론트맨 역시 검은 가면을 벗으며 동생을 향한 애틋함을 엿보인다. 게임을 창조한 오일남 역시 기훈과의 우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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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은 믿을만해서 믿는 게 아냐,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어서 믿는 거지"     

사람은 원래 믿을만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 믿어야 기댈 수 있다. 기대지 않고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믿을만하지 못한 사람을 믿고 기댄다는 것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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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돌멩이가 되고자 하는 충동, 자아를 지우고 비인간화되고자 하는 무의식적 충동이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충동에서 탈출해야만 하는 숙명을 지고 있다.

 

돌멩이가 아닌 하나의 인격이 되어 누군가와 서로 기대야만 한다는 숙명이 있다. 그 숙명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강렬한 욕망으로 변모한다.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 싶은 욕망, 누군가의 신뢰와 의존을 짊어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타오른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결국 그 대립된 방향의 두 에너지 사이에서 끝없이 불안해하는 결핍된 존재라고 역설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충동과 욕망의 모순된 공존을 견뎌야만 한다.          

 

사진_넷플릭스 '오징어게임'
사진_넷플릭스 '오징어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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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은 기훈이다. 똑똑하고 교활한 상우도, 잔인하고 강력한 덕수도, 악착같은 미녀도 아니다. 어딘지 어리숙하고 모자란 기훈이다.

 

기훈은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일남에게 손을 내밀어 주기도 하지만, 깜박거리는 일남을 거듭 속여가며 구슬을 빼앗기도 한다. 마냥 착하지도 마냥 나쁘지만도 않은 이도 저도 아닌 인물 기훈의 가장 큰 무기는 모두에게 인간적으로 대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생존을 꾀하기보다 관계를 택한다. 목숨이 걸린 게임이라는 긴박감이 없는 건가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마지막 결승에서도 승리마저 포기해가며 상우를 살리려 한다.

 

서로를 비인간화하고 스스로를 비인간화하고자 하는 자들의 무대인 오징어 게임에서 기훈은 상대를 인간화한다. 결핍되고 불안한 존재는 또 그렇게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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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진화 연구로 유명한 듀크대학교의 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협력적 의사소통의 진화를 강조한다. 수십만 년 전 우리와 함께 존재했던 유인원들인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인들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인지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더 우월한 면이 많았다고 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우리보다 100만 년도 더 먼저 손도끼와 각종 석기 도구를 쓰기 시작했고 도구에 대한 원시적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우리보다 월등한 사냥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무 창을 던져 거대한 매머드를 사냥할 줄 알았고, 죽은 자를 매장하며 장신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멸종하고 우리가 살아남았다. 지구를 정복하고 화성으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일은 호모 사피엔스만이 해낼 수 있었다. 브라이언 헤어 교수는 그 비결이 바로 협력하고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자의 98%를 공유한다. 침팬지는 의사소통 능력과 습성, 집단 생활 양상들이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침팬지와 인간의 커다란 차이점 중 하나는 적대감과 친화력이다. 침팬지는 자신의 생존 자원을 지키는 양상이 무척 적대적이다. 무리의 경계를 순찰하며, 낯선 존재는 서슴없이 공격한다. 하지만 인간은 처음 보는 상대와도 대화하고 관계 지을 수 있다.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 인간은 그 어떤 유인원보다 친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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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헤어 교수는 진화란 '가장 경쟁적인 존재'의 번성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장 경쟁적인 존재는 언뜻 생존에 가장 유리할 것처럼 보인다.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을 만한 지력과 무력을 갖출 수 있고, 가장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고, 타인의 번식을 방해할 수 있는 존재가 가장 생존에 적합할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법칙처럼 말이다.     

 

하지만 헤어 교수의 책에서도 이야기하듯, 찰스 다윈은 적자생존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진화란 그냥 살아남는 존재가 살아 남아 번식하는 과정의 누적이다. 그 살아남는 자가 꼭 적자(Fittest)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럼 누가 살아남는가?

 

헤어 교수는 그것이 가장 친절한 자(Friendliest)라고 주장한다. 협력할 수 있는 존재. 낯선 이에게 손을 내밀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깊은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더 큰 집단을 이루고 더 큰 지성을 이루고 더 큰 존재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존재,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강한 존재는 결국 협력적 존재들의 연대를 결국 이길 수 없다. 상호 의존적인 존재들이 협력하며 이루어내는 집단의 힘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자연은 즉자(卽自)하는 존재를 선택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의존하며 함께 공존(共存)하는 자를 선택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라는 법칙이 정말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한 비결일지도 모른다. 오징어 게임에서 생존한 자가 기훈이었다는 것이 상징하는 바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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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 불안이 필연적이라면 그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결핍과 불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그 안의 평안과 따뜻함을 찾을 수 있다.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겪은 현실 속 지옥이 그러하듯, 우리는 고되고 불안하다.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무게는 때때로 끔찍하게 괴롭다. 심지어 모든 것을 부수고 죽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빚어낼 정도로 괴롭다.

 

그러나 슬프고 우습게도 우리는 모두 그 '누군가' 덕분에 존재한다. 또 그 누군가 역시 우리 덕분에 존재한다. 

 

우리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안하고 모순되어 있다면 유일한 길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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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징어 게임을 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모두가 그저 각자만의 존재를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 먼 눈으로 분투하는 체스판이 아니다. 심지어 오징어 게임마저도 그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이리저리 구르는 돌멩이들처럼 살아가지 않는다. 돌멩이들이 서로 부딪히며 이따금씩 튀기는 불꽃만이 뜻 없이 명멸하는 그러한 곳은 우리의 존재를 조명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 두려운 그 타나토스의 충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돌멩이가 아니다. 우리는 분명 누군가와 함께 할 때에 존재한다. 그 관계가 우리를 때로 좌절시킬지라도 말이다.     

 

피할 수 없는 모순을 받아들인 다는 것, 괴롭지만 관계를 지켜나간다는 것, 불안하지만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 그 요원한 말들이 허무한 단어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관계 안에서 너와 내가 눈물겹게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존재를 지탱하는 관계들이 찔러오는 괴로운 가시와 고된 무게를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안에 공존하는 따뜻함. 사랑. 다정함. 친절함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야 우리는 결핍되고 불안한 우리 자신의 실존을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따듯함이 나의 존재를 설명해준다는 벅차오름을, 모두의 존재 속에 내가 함께 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서 오는 충만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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