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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옥에 있습니까? - 넷플릭스 [지옥]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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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입력 2021.11.26 08:00

 

 

[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

 

 

(이 글은 넷플릭스 <지옥>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이 인간 세상에 직접 간섭을 시작한다. 천사가 나타나 정확한 사망 날짜를 제시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예언을 하는 것이다. 누가 언제 죽을지에 대한 예언은 법원이 결정 사항이나 명령을 당사자에게 알리듯 ‘고지(告知)’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무표정의 천사는 아무런 예고 없이 인간들의 삶에 나타나 이렇게 고지한다.

 

‘너 ㅇㅇㅇ은 00년 0월 0일에 지옥에 간다.’

 

고지는 곧 ‘시연(試演)’으로 이어진다. 당사자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든, 지옥에서 온 사자는 날짜에 맞춰 고지받은 인간을 찾아간다. 그리고 진짜 지옥에 가기 전 마치 인간 세상에서 작은 지옥을 맛보기로 보여주듯이 시연한다. 사자에게 난도질당한 인간은 화형을 당한 듯 재가 되어버린다. 고지를 받은 이는 절대 이 시연을 벗어날 수 없다. 재난이 갑자기 찾아와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 듯, 갑작스러운 고지는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심지어 시연이 두려워 고지를 받은 후 자살한 사람 또한 시연을 면치 못한다. 고지된 당일이 되면 사자는 이미 자살한 사람마저도 난도질해 버린다.

 

난데없는 고지, 무자비한 폭행과 화형으로 이루어지는 시연. 인간 세상은 두려움에 빠진다. 세상이 두려움과 공포, 혼란에 휩싸인 사이에 신의 심판을 외치는 종교 단체 ‘새진리회’가 부흥한다. 여기서부터 인간들은 또 다른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사진_넷플릭스 '지옥'
사진_넷플릭스 '지옥'

 

 

새진리회는 지옥행 선고와 사자의 등장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신의 뜻으로 포장한다. 죄를 지었으나 인간 세상에서 처벌하지 못한 자를 신이 엄벌하는 것으로, 즉 신이 인간 사회의 정의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공포는 전염성이 빠르다. 그리고 공포에 휩싸인 인간은 나약하다. 이미 고지와 시연이라는 비현실적 현상을 목격한 사람들은 빠르게 정의와 처벌이라는 새진리회의 교리에 순종해 간다. 벗어날 수 없는 공포의 지배하에서 사람들은 새진리회가 실현하려 하는 ‘정의’에 목을 매며 자신을 옥죄어 간다.

 

새진리회의 정의 구현 시스템 속에서 고지를 받은 자는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시연은 반드시 공개되어야 한다. 고지를 받은 이의 가족들은 함부로 슬퍼할 수도 없다. 그저 겸허히 시연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고지받은 이의 가족이라는 것은, 즉 ‘죄인을 담은 가족이라는 낙인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진리회의 힘이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감히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가족이 고지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해진다. 가족의 죽음을 숨길 수 있을 때 슬픔보다 안도감을 느끼게 되면서 인간 세상은 진정한 지옥이 되어간다.

 

“나에게 닥친 불행을 다른 무엇도 아닌 불행 그대로 온전히 슬퍼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새진리회에서 말하는 신의 뜻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고지와 시연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언 즉, 고지와 시행은 무작위로 이루어졌다. 지진과 홍수, 태풍 등의 재난 및 사고가 특정 대상을 목표로 발생하는 게 아니듯이, 착한 사람은 피해 가고 나쁜 사람에게만 찾아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새진리회가 말하는 신의 뜻은 정의에 있지 않았다. 정의는 인간 세상을 지배하지도,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고지와 시연 등의 공포로 점철된 정의는 더욱더 그러하다.

 

사진_넷플릭스 '지옥'
사진_넷플릭스 '지옥'

 

세상은 원래 무작위적이다. 인간은 무작위 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만들어낸다. 기쁜 일에 기뻐하고 슬픈 일에 슬퍼할 수 있을 때, 즐거운 일에 즐거워하며 괴로운 일에 괴로움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 무작위로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감정을 느끼고, 그러한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만들어가면서 우리는 다시 세상에 영향을 준다. 인간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이 모여 세상을 형성하는 것이다.

 

Irvin Yalom(스탠포드 대학 정신의학과 명예교수)은 ‘삶의 의미는 신성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다. 각 개인은 독특하고 고유한 존재로서 스스로 그 의미를 고안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삶에 전념할 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저는 신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제가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란 거예요.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하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지옥>에서 보여주는 지옥이란 고지를 받고 무자비한 고통을 느끼는 시연뿐일까? 어느 순간부터 슬퍼해야 할 일을 숨기는 데 급급하고,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 숨겼다는 안도감이 더 정의로운 사회는 <지옥> 속의 지옥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가 모여 세상을 형성하지 않는다. 정의 또한 그러하다. 세상은 인간이 모여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인간이 산다.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는지, 살아갈 것인지, 그 세상에 지옥에 가까울지 아닐지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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