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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1세대 이민자 안재창 (3) '하와이 생활과 본토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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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3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은 1902년 미국 하와이로 가는 첫 번째 이민선에 올랐던 안재창 세 번째 시간으로 안재창의 하와이 생활과 본토 이주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20년 콜로라도주 덴버의 안재창(왼쪽 두번째) 소유 농장을 방문한 이승만(오른쪽) 등 재미 독립운동가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있다. (안형주 제공)

1920년 콜로라도주 덴버의 안재창(왼쪽 두번째) 소유 농장을 방문한 이승만(오른쪽) 등 재미 독립운동가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있다. (안형주 제공)

 

제물포항을 떠난 최초의 이민단은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이틀 후엔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했고, 이들은 1주일 뒤인 1903년 1월 3일, 미국 상선 겔릭호를 타고 10일간의 항해 끝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습니다.

 

안재창이 탄 첫 이민선은 1월 13일 새벽 호놀룰루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 피어선 목사의 도움으로 겔릭호 선상에서 세관검사와 검역검사, 그리고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첫 한인 이민자 102명이 신체검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8명이 눈병에 걸린 것으로 드러나 그들의 부양가족을 포함해 16명은 배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당시 안재창을 포함한 한인 이민 1진 가운데 신체검사와 이민국 심사를 통과한 86명은 기차를 타고 호놀룰루 북서쪽 해변의 와이아루아 농업회사의 모쿠레이아사 농장에 보내졌습니다.

 

하와이 이민 한인들의 초기 3, 4년간의 상황은 주로 주한 미국 선교사들의 하와이 방문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05년 11월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주한 미국 선교사가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에 ‘하와이의 한국인들’이라는 보고서 형식의 글을 게재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하와이 여러 섬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낭독: 보고서] 호놀룰루에 있는 한인들은 서기, 정원사, 요리사, 마부 등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일정한 수입을 갖고 있다. 대체로 한인들은 조용하며행동거지가 조심스럽다고 알려졌다. 농장에서 일할 없는 신체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은 벌써 쫓겨났고, 지금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성공한 일꾼들로 농장 일에 만족하고 있다.

 

조선에서 한인들의 이민을 주선했던 조지 허버 존스 목사도 1906년 미국에서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한인들의 상황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존스 목사는 1906년 ‘코리아 리뷰’ 11월호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게재했습니다.

 

[낭독: 존스 목사]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이들의 월급은 18달러이고 하루 10시간씩 26일을 일한다. 가족들은 조금만 텃밭이 있는 집에서 무료로 산다. 병원 치료는 무료이다. 아이들은 미국인 교사가 있는 학교에 무료로 다니며, 학교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매달 실 생활비는 6달러에서 9달러이다. 한인들은 양복을 입고 양식도 먹으며 가능하면 미국인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한인으로서 최초의 하와이 한인에 관한 보고서를 쓴 사람은 윤치호였습니다. 그는 고종황제 지시로 하와이 한인들의 생활실태를 돌아보기 위해 하와이를 방문했습니다.

 

윤치호는 1905년 9월 8일부터 10월 3일까지 약 한 달 동안 오아후, 카우아이, 마우이, 하와이섬에 흩어져 있는 32개 사탕수수 농장을 시찰했습니다. 그 뒤 윤치호는 고종황제에게 올리기 위해 쓴 보고서에 하와이 한인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낭독: 윤치호 보고서] 대체로 외국인들은 대부분의 한인이 체격이 건장하고 일을 빨리 배워, 다른 종족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대체로 한인들은 경제 관념이 없어 10명 중 7명은 월급 미화 18달러를 다 쓴다. 그러나 개중에는 6개월에 50달러 내지 60달러를 저축한 이도 있고, 지난 2, 3년 동안 400달러에서 500달러를 저축한 이도 있다.

 

윤치호는 하와이에서 본 한인들을 만족하게 생각했고 하와이가 이민지로 한인들에게 좋은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기후와 음식이 좋다. 둘째 일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가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셋째, 세상을 알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하와이를 포함해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신분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바로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조약’이 체결됐던 것입니다.

 

대진대학교 김지원 교수는 을사조약으로 미주 한인들의 신분이 일본 신민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지원 교수] “을사조약 이전에는 미주 한인들의 법적 지위는 대한제국의 국민이었어요. 그런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들의 법적인 지위가 일본의 신민으로 변환이 됐어요.”

 

이렇게 신분이 바뀌면서 미주 한인들을 관리하는 주체도 변환됐는데요. 다시 김지원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취: 김지원 교수]​ “을사조약 1조에서 보면 일본 정부가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서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한다고 돼 있어요.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은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각 국가에 있는 일본 영사와 공사가 대리해서 보호하게 됐거든요. 그렇게 되면서 조처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1906년 2월이 되면 대한제국 정부는 해외 한인은 어느 곳에 있든지 일본 영사의 보호를 받으라고 명을 하게 돼요. 물론 미주 한인들은 이걸 거부하지만, 그들의 법적인 지위가 일본의 신민으로 적용이 되고 실제로 1906년부터 이 지위가 적용이 됩니다.

 

이런 가운데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1905년 돌연 해외 이민을 전면 금지하는 조처를 발표했습니다.

 

대한제국이 해외 이민을 금지한 공식적인 사유는 1905년 영국인과 일본인이 불법 시행한 한인들의 멕시코 이민 결과 한인들이 현지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강요당하기 때문에 해외 노동 이민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 정부가 자국민 보호를 위해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하와이에 한인 이민의 숫자가 늘면서 일본인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할 우려가 커져 하와이의 일본인 이민자들은 조선인의 노동 이민을 금지해야 한다고 본국에 건의한 것입니다.

 

이런 건의를 받은 일본 정부는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대한제국에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압력이 대한제국 외무장관의 이민금지령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첫 이민선을 타고 왔던 안재창은 10개월 동안 한인 이민자들이 보내진 모쿠레이아 농장에서 일하다 한인 노동자들이 많은 에와 농장과 가까운 ‘와이파후’ 농장으로 1903년 11월에 옮겨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안재창이 미국 본토로 이주할 기회를 본격적으로 엿보기 시작한 것은 하와이에 도착한 지 3년 반이 지난 1906년 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안형주 씨​]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4년 일하면서 돈을 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와이 농장의 임금이 하루에 75전이었는데, 그의 두 배인 1달러 50전인 미국 본토로 가기를 원했고 미국 본토에 가서 자유기업제도를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당시 하와이에 와서 서부 간선 철도를 놓는 철도회사 노동자 모집에 응하지 않고 화물선을 타고 미국 본토에 동료들과 밀입국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두 번째 모험이었습니다.”

 

안재창이 미국 본토로의 정식 입국이 아닌 밀입국을 시도한 것은 미국이 일본인과 한인의 본토 이주를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대진대학교 김지원 교수는 본토 이주 금지가 미국 내 일본인 배척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지원 교수]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본인 배척 운동 때문이었습니다. 일인의 이민을 중단시키기 위한 것인데, 1907년 3월에 있었던 행정명령 589호거든요. 즉 하와이, 멕시코, 캐나다 등을 경유해서 미국 본토, 대륙으로 입국하는 숙련, 또 비숙련 일인 및 한인 노동자들의 금지하는 것이 바로 그 조처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은 실제로 한인은 굉장히 수가 극소수였거든요. 그래서 이민을 제한할 필요가 없었어요. 당시에… 미국 정부에서… 그런데 법적인 지위가 일본의 신민이기 때문에 계속 엮어가는 거예요. 일본인 이민하고…”

 

‘인물로 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안재창’ 3편으로 안재창의 하와이 생활과 본토 이주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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