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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의리, 한국의 정, 그리고 미국인의 인간관계

Winnipeg101 LV 10 22-01-02 310


‘미국인은 문서로, 일본인은 의리로, 한국인은 정으로 계약을 맺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사람들을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화와칼

 

원래 의리라는 말은 일본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자로는 義理라고 쓰고 일본사람들은 /Giri/라고 발음한다. 미국인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이 의리를 일본 특유의 민족성으로 보았다. 그는 <국화와 칼>에서 이런 말을 했다.

 

중국이나 유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닐뿐더러 동양의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본 특유의 범주로서, 의리를 고려하지 않으면 일본인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리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와 연결되는데 그래서 인지 일본인들은 은혜를 갚는(報恩) 이야기에 항상 깊은 감동 받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면에서 이 의리라는 것은 상당히 폭력적인 행동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만 그 사람의 적인 상대에게는 무자비하다. 일본인들은 개개인으로는 참 좋은 사람들이지만 집단으로는 섬뜩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일본 회사와 비즈니스를 할 때도 의리라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한국 회사를 다닐 때 일이었다. 회사가 추진하는 사업중에 하나가 일본 한 회사의 특허권과 연결되어 분쟁이 될 뻔한 적이 있었다. 연구 단계부터 회사는 특허 관련 법을 사전에 검토를 했었고 법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사업을 진행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해당 일본회사가 그 일을 알게되었고, 그 일본 회사는 사전에 자기 회사에 양해를 구하지 않은 우리 회사의 태도에 분노했다. 그들은 한국 회사가 신의를 저버린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대부분의 사업 결정은 이해득실이나 계약관계보다도 신의를 지키느냐가 우선된다. 당시 나는 원가 담당자였기 때문에 해당 일본 회사에서 만드는 재료를 계속 사용할 경우와 아닌 경우를 비교하는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었다. 그래서 비교적 생생히 기억하는 편이다. 당시 회사는 국제법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향후 비즈니스를 생각해서 상당한 금액의 로열티를 지급하는 선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었다.

 

서양에는 의리라는 개념이 없다. 일본의 무협영화나 만화들은 사나이들끼리의 의리가 주제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소재는 서양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형제애(brotherhood)나 동료애(companionship) 같은 소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의리와는 다르다. 위키피디아에서 Giri를 검색해보면 duty / obligation / burden of obligation으로 번역되어 있다. 딱히 와닿지는 않는다. 번역할 만한 적당한 단어가 없는 것 이다. 일본적인 개념의 의리는 조직사회의 관계보다는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사무라이와 주군(다이묘)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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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의리라는 말이 큰 유행을 했다. 김보성의 의리 광고와 홍명보의 의리 축구는 올해 최고로 화끈한 topic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말하는 의리는 일본의 의리와 많이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의리는 어찌보면 ‘정(情)’에 가깝다. 의리를 말할 때 우리는 친구 간에 끈끈함을 떠올린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도 소주 한잔 마시거나 (남자들의 경우), 시어머니 흉을 보고 나면 (여자들의 경우) 다음날 부터는 바로 절친이 되어 속마음까지 다 보여준다. 이런 풍경은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것 같다.

 

cold-shoulder

 

일본 사람도 우리 기준으로 차갑지만 미국 사람은 더하다. 예를 들어 미국 회사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오늘 무슨일을 잘해주었다고 하자. 그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하겠지만 그게 전부다. 다음날 만났을 때 그 사람은 나에게 더 친하게 굴지 않는다. 같이 운동하거나 술을 마신 이후에도 이것은 마찮가지 이다.

 

반대로 내가 잘못을 한 경우도 그렇다. 한번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다음날 그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 실수에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또 그 실수를 통해서 내가 무능하다거나 불성실하다는 판단이 들지 않는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별로 의미가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실수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계산적으로 이루어 질 때가 많다. 미국 사람들은 필요가 없으면 굳이 관계를 맺지도 않고 친분도 생기지 않는다.

 

미국사람들은 낯선사람과 친구의 차이가 크지 않다. 전혀 처음보는 사람도 절친처럼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그 다음날 언제그랬냐는 듯이 차갑다. 물론 그들도 정말 친한 친구와 덜친한 친구들이 있지만, 친한 친구가 우리나라의 죽마고우 같은 정도로 가까운 느낌은 없다.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낯선사람에게는 한없이 차갑다. 그렇지만 일단 친구의 범주에 들어가면 한없이 가까워진다. 정말 끈끈한 민족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은 일종의 큰 규모의 가족 같은 관계이다. 그래서 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안면만 트게 되면 바로 ‘오빠’/’동생’/’삼촌’/’이모’ 이다. 그리고 조금만 친해지면 참견을 못해서 안달이다. ‘왜 결혼을 안하냐?’ ‘살은 언제 뺄꺼냐?’ ‘애기는 안가지냐?’ ‘둘째는 안났냐?’ 외국 사람이 들으면 불쾌할 것 같은 참견을 서슴없이 우리끼리는 하고 산다.

[1]우리가 남이가 로고

내가 느끼기에는 우리는 회사나 사회, 국가도 이렇게 일종의 가족같이 여기지 않나 싶다. 누군가 밤늦게 고생해서 야근하면 딱히 내가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같이 남아서 커피라도 한잔 타주는 게 우리 식의 ‘정’이다. 처음 미국 회사에서 일 시작했을 때, 보스가 야근을 해야 한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 업무가 익숙치 않아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 미안해서 남아 있었다. 보스는 어이없어 하면서 니가 왜 여기 남아있는가 묻는다. 우리나라도 예전 같지 않아서 점점 덜해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정’으로 묶여있다. 서로 엮여 사는게 지긋지긋 하다고 말로는 그러지만 그놈의 ‘정’ 때문에 매몰차게 뒤돌아 서지 못한다.

 

이렇게 보니 딱히 어떤게 좋다/나쁘다 말할 성질의 것은 없는 것 같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는 싫다. 좋은것만 골라서 가졌으면 좋겠으나 ‘좋고 나쁨’은 동전의 양면 같이 하나로 붙어있다. 미국에 살다보면 한없이 차가운 미국사람에 정떨어지다가도 이것저것 남의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세상이 편하기도 하다.

태그 : https://isaacinseoul.com/2014/08/14/일본의-의리-한국의-정-그리고-계약의-미국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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