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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일을 행(行)하지 말자

Winnipeg101 LV 10 08-28 52

홍순종(jmbook)

등록 2000.12.01 19:21

수정 2000.12.01 21:11
 

 

이것은 역설(逆說)이다. 동시에 진실(眞實)이다. 착한 일은 행하지 말아야 한다. 
착한 일을 행(行)하지 말자.

물론 그렇다고 악한 일을 행하라는 것은 더욱 아니다. 착함은 악함과 비교되어 생겨나는 개념이다. 일례로, 남을 돕는 것은 돕지 않음을 생각하고 비교되어 생겨나는 착한 행위이다. 길에 쓰러진 할머니를 일으키는 것은, 모른 척하고 지나치기보다 착한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거지에게 동냥을 주는 것도 동냥을 하지 않는 것보다 착한 일이란 관념 때문에 한다. 기독교의 십인조(十一條)나 불교의 보시(布施)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행을 하면 선한 과보를 받는다. 남을 돕거나 짐승과 같은 미물, 심지어 미생물에게도 착한 해위를 하면 선업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선업(善業)도 업(業)이다. 이 점을 가르쳐 주는 면에서 불교가 타종교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선업도 업이기 때문에, 선을 선으로 여기고 행한 착함은 착함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가? 모르게 한다는 것은 곧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억지로 모르게 하려면 더 잘 알게 된다.
 

선(善)과 악(惡), 정(正)과 사(邪)의 기준은 누구나 갖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행위 등은 분명히 착한 행위이나, 만일 이것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거나 일종의 의무방어, 또는 자기 과시를 위한 행위라면 자신에게 전혀 이로울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좋은 과보로써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없으니 착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악행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착한 일을 함에 있어 반대급부를 기대하면 아니 된다. 불교에서 가르치듯 무루보시(無漏布施를 해야 하고 선법에 머물러 착한 행위를 해야 한다. 

착함을 행하는 사람의 몸과 의식이 모두 선법에 젖어 있어야 하며, 착함을 분별하지 않는 착함을 해야 한다. 즉, 착함을 느끼지도 못하는 가운데 착함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착함은 과보로써 자신을 얽맨다. 선법에 머물지 않고 착함을 하면 잘 해봐야 본전밖에 되지 않는다. 착함에 대한 과보가 이렇거늘 하물며 악함에 대한 과보랴?

선법은 착한 법이다. 선법은 때묻지 않은 것이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원만하고 눈 뜬 사람들이 보아 누구도 부정 못하는 착한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법에 머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즉, 자신이 선법에 머물러 있음조차 몰라야 한다. 이렇게 법체(法體)가 된 사람은 착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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