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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선 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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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이에서 ‘선’에 대한 기준은 인간의 생김새만큼이나 제각각이다. 거리두기가 모든 관계의 미덕이 된 시대, 연인과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만들어주는 ‘적정선’은 어디까지일까? 코스모가 선을 넘는 사람들, 선 근처에도 오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 그 답을 찾았다.

BYCOSMOPOLITAN2021.02.15

 

 

 

선을 넘는 녀석들 
“연인이 ‘와, 얘 선 넘네’ 하고 느끼게 한 적 있어?” 주변의 현역 ‘연애인’들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지체없이 쏟아내는 각종 한탄과 성토들. 취업 준비생 김재혁(27세) 씨는 여자 친구가 자신의 미래에 훈수를 둘 때 선을 넘는다고 느꼈다. “여친이 어느 날부터인가 제 진로에 개입을 하더라고요? ‘네가 하려는 건 유망 직군이 아니다. 다른 분야로 바꿔라. ○○ 자격증 공부를 해보는 건 어떠냐.’ 어이가 좀 없었지만 싸우기 싫어 그냥 듣고 넘겼어요. 그랬더니 자기 말에 동의한 줄 아는 건지 계속 그런 얘길 반복하더라고요. 참다가 결국 헤어졌어요.”   


회사원 이현아(31세) 씨 역시 남자 친구의 선을 넘는 집착으로 이별을 고민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본인이 전화나 문자를 했을 때 바로바로 답이 없으면 괴로워해요. 처음엔 ‘내 생각을 자주 하는구나. 연락 뜸한 남자보단 낫지 뭐’ 하는 생각에 기분 좋게 응했는데 사귄 지 1년이 지났는데도 계속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제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자기가 다 알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하네요. 이런 점 말고는 대부분 잘 맞는데, 숨은 막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연인 관계에서 ‘선’에 대한 기준은 저마다 판이하지만 남녀 싱글 모두 “너무 갔다”라고 입을 모으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통제하거나 휘두르려고 할 때 당한 사람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거나, (그 관계에서) 손을 떼고 싶어 한다. 결혼하면 자신의 부모님이 믿는 종교로 개종할 수 있냐고 떠보는 남자, 정리를 잘하는 여친에게 “종종 자취방을 청소해달라”며 조르는 남자 등, ‘부탁’의 영역에 들이기엔 미묘한 요구로 선을 넘는 이들도 있다. 가장 가까운 사이니까, 사랑하니까, 나도 그만큼 희생하니까, 내가 너한테 잘하니까 같은 이유가 엄연히 타인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구실이 될까?   


제발 좀 넘어와!  
반면 ‘정’으로 포장된 참견과 오지랖의 물결 속에서 꿋꿋이 자기 영역을 방어하는 이와, 절대 한 발자국 더 다가오지 않는 상대를 보며 마음 졸이는 이도 있다. 교사 이영림(30세) 씨는 연애 의지를 놓아버린 무기력한 남자들에게 쌓인 불만을 토로했다. “남친이 선을 넘어서 상처받은 적 있냐고요? 제발 선 좀 넘었으면 좋겠어요. 결혼을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겁을 낼까요?”   
독일에 사는 프로듀서 성다혜(32세) 씨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남자들에게 질린 경우. “한국과 달리 유럽엔 ‘썸’과 ‘사귀는 사이’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관계가 있어요. 어떤 데이팅 앱엔 섹스 파트너 혹은 진지한 관계 등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시할 수 있는 항목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남자들이 굳이 ‘릴레이션십’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요. 섹스 파트너와 연인이라는 관계 사이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줄타기를 하다가 쓱 빠지죠. 저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오랜 기간 만나다 보면 관계가 진전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딱 그 타이밍에 다들 비겁하게 사라지더라고요.” 과하게 다가오는 사람만큼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않는 사람 역시 상처를 남긴다. 임상심리 전문가 김정연 박사는 그런 행동 역시 ‘상처받길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귀띔한다. 즉 가벼운 만남을 즐기며 친밀한 관계를 기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한 모습이나 내면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에 곧잘 빠지긴 하지만, 상대의 어떤 모습에 실망하면 상대방 감정은 배려하지 않고 곧장 그 관계를 끝내곤 합니다. 누군가와 친밀감을 형성하는 일이 이별하는 일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죠. 불완전하고 초라한,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보여줄 용기가 없어서, 그런 모습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의 안전 거리  
그렇다면 적정한 거리의 표준이 있긴 한 걸까? 놀랍게도 수치화된 기준이 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관계에 따라 필요한 거리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밀도가 높은 관계에선 사랑을 나누고, 위로하고, 서로를 보호하는 등의 행위가 일어나는 거리, 즉 대화뿐 아니라 촉각·후각 등의 감각을 통해 밀접하게 소통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0~46cm 정도가 ‘적당한 거리’다. 친구 혹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에선 손을 뻗으면 상대방을 가볍게 터치할 수 있는 46cm~1.2m, 직장이나 공적인 관계 등 비개인적인 교류가 일어나는 관계에선 1.2~3.6m, 개인과 대중, 즉 교사와 학생들, 가수·배우와 관객 사이의 거리는 3.6~7.5m가 상호간에 편안함을 느끼는 거리. 각각의 관계를 벗어난 사람이 이 영역 안으로 들어오거나 혹은 바깥으로 나가면 대부분의 사람이 침범이나 방관으로 느낀다.   


물리적 거리보다 더 중요한 건 물론 심리적 거리다.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는 저서 〈당신과 나 사이〉에서 ‘거리’가 야기하는 갈등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면서도 고유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어요. 즉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그 상대에게 전부 흡수돼 내가 없어지거나, 상대에 의해 휘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면서 자율성을 지키고 싶다는 욕구가 나타나게 마련이죠. 그래서 어느 한쪽이 떨어져 있는 상태를 지나치게 못 견뎌하면 다른 한쪽이 고유의 자율성을 침해당한 데 대한 분노를 터트리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요.” 결국 거리에 대한 생각 차를 좁히기 위해선 물리적·심리적인 ‘따로 또 같이’의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한다. 연구원 박민영(34세) 씨는 연애 초부터 남자 친구에게 자신한테 필요한 ‘거리’를 명확히 말한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남친에게 ‘나한테 꼭 필요한 개인적인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지켜야 연애도 회사 일이나 일상생활도 잘할 수 있다고 얘기했죠. 저는 바이오리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사람이라서 밤 9시 이후엔 모든 일을 끝내고 휴대폰을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한 다음 책을 읽다 잠자리에 들어요. 일요일엔 집에서 조용히 쉬어야 하고요. 대신 그 외의 시간엔 관계에 충실하려고 노력해요. 중요한 건 거리를 두자는 말이 ‘너와 이 선 이상으로는 가까워질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상대가 알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김혜남 전문의는 이 물리적이며 심리적인 ‘퍼스널 스페이스’가 너무 가까워서 서로 상처 입지 않으며, 너무 멀어서 외롭다고 느끼지 않는 최적의 거리를 조절해주는 기지라고 말한다. 밀착과 분리의 밸런스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먼저 파악한 후 상대와 그 마음을 솔직하게 공유하는 것, 두 사람 사이의 적정선을 찾아 합의하는 것, 다른 관계를 챙기고 싶은 욕구를 인정하는 것, 상대가 그런 시간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에 건강한 ‘거리두기’의 답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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