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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피로증후군(人間關係 疲勞症候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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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 권 오병(아썸 대표, 생태학박사)

 

인간의 사회적 정의는 사람(人) 사이(間)의 관계라는 뜻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관계는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인 셈이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인간관계는 계속되며,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았는가가 각자의 인생 자체인지도 모른다. 한 생명체로서 이 세상에 처음 올 때는 본인의 선택권이 배제된 운명적 관계로 태어나지만, 살아가는 동안은 선택이 가능한 수많은 인간관계의 중첩 속에 살다가 때가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관계의 가장 핵심적 위치에 있는 혈연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모와 조상을 본인이 선택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는 자연생태계의 모든 생명에게 동일한 조건으로서, 매우 중요한 진화론의 전제가 된다. 즉 현존하는 모든 생물 종에겐 주어진 환경적 조건에 최적의 생존능력을 보유한 개체군이 살아남았고, 이를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에 자신이 적응했다라고 보지만, 거꾸로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조건이 특정개체를 선택한 모양이 된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선택은 배우자의 선택이다. 이 땅에 자유연애 결혼제도가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권리로서 법적으로 성인이 된 남녀 누구에게나 평등한 권리가 보장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혼인은 저울에 달아서 한다” 는 속담처럼 우리사회의 관습은 비슷비슷한 수준의 집안끼리 알아서 결혼을 한다. 양가 집안의 경제적 수준과 사회적 위치, 당사자의 학벌, 능력과 외모는 매우 중요한 변수로서 결혼하는 당사자 스스로 엄격히 내면화된 판단 기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재벌집안의 자손들은 대대 동급의 재산가들이나 정치권력을 가진 집안의 자손들과 결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부와 권력 등은 결혼제도를 통해 더욱 공고해지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빈부의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는 역사시대 이래 동서를 막론하고 지켜진 인류사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평등을 최고 가치로 꼽는 공산국가나 사회주의 국가조차도 예외가 아닌걸 보면 인간의 본질적 정체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변두리쯤에 위치한 우리 사회의 오늘날 결혼풍습도 대체로 사회 경제적 신분체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슷한 나이의 처음 보는 성인 남자들 대여섯 명이 수인사를 하는 자리는 대개 5분 이내에 서열이 정해진다. 처음 자연인의 나이가 몇인가를 확인하고, 성씨가 무엇인지 묻고, 고향이 어디인가,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가, 직업은 무엇인가, 군대생활은 언제 어디에서 했는가 정도를 서로 확인하면 곧바로 보이지 않는 서열이 확정된다. 그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은 술자리 같으면 바로 형님동생 호칭이 부여되기도 한다. 사회생활의 핵심요소 6가지 중에 두 가지 이상의 공통점을 찾아내면 일단 동질성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되어 임시 서열을 정하고 인간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동물사회에서도 무리를 지어 집단생활을 하는 종에서는 반드시 서열이 정해진다. 사자나 악어 등 맹수들 뿐 아니라 원숭이, 침팬지, 고릴라 등의 영장류에서도 무리를 이끄는 대장 수컷이 있고, 그에 복종하는 약한 무리들이 한 집단을 이루며 서열사회를 형성한다. 한 집단의 영역에 낯선 떠돌이가 침입하면 일단 무리의 적으로 간주하고 경계한다. 외부 침입자를 퇴치하는 역할은 주로 대장 수컷이 담당하며, 물리적 힘에 의존한다. 이는 무리 전체의 생존과 직결되므로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데에는 반드시 긴장과 에너지가 동반된다. 부모의 양육기간을 제외하면 나머지 기간의 대부분은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간관계를 통해서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의 지위로부터 태생적으로 물려받은 지위도 작용하지만, 오늘날 인간사회는 워낙 많은 인구가 복잡한 사회에서는 동급의 집단에서도 수많은 서열과 경쟁이 있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유치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성적평가에 의한 우열을 가리는 치열한 경쟁체제하에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선진사회에서 일등 제일주의, 승자독식주의는 마치 너무나 공평한 제도라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질서처럼 여겨지고 있다. 무한경쟁 속에 내몰린 학생들은 금쪽같은 10대의 대부분을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사춘기의 열정을 억압당한 채, 오로지 학업성적의 노예가 되어 동자승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어차피 상대적으로 좋은 대학의 정원은 정해져 있고, 모두가 노력해도 1등자리는 언제나 하나뿐이다. 1등이 되지 못한 대부분의 나머지 학생들은 자존감을 상실하고, 타인으로부터 객관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남겨져야 한다.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가서도 다시 취업경쟁에 휩쓸려 신입생 시절부터 성적관리와 스펙 쌓기에 한눈 팔 틈이 없다. 취업경쟁과 병역의무를 마치다 보면 20대 10년도 훌쩍 가버린다. 게다가 부자 부모를 만나지 못한 대부분의 청년들은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온갖 아르바이트를 밤낮으로 전전해야 한다. 그러나 안정된 직장으로 꼽히는 공무원 자리와 몇몇 대기업의 자리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수십 대 일, 혹은 수백 대 일의 관문을 뚫어야 한다. 어지간한 중견기업의 공채자리도 하늘의 별따기요, 수많은 중소기업도 불안한 경영전망 때문에 더 이상 신입사원을 뽑지 않는 회사들이 많다. 이렇게 수많은 경쟁을 견디고 직장에 취직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들 앞에 놓여진 운명은, 또다시 동기간과 상하간의 끝없는 전쟁과 같은 실적경쟁이 펼쳐진다. 경쟁에서 조금만 밀리거나 불운한 사람들은 나이가 먹을수록 더욱더 사회적 위치의 간극은 벌어져, 이윽고 가난은 대를 물리게 되는 처지가 오늘날 우리사회의 현주소이다.

한국사회의 총체적 병증은 “인간관계 피로증후군”이라 본다. 한때 잘나갔던 우등생도, 순식간에 추월당할 수 있고, 명문대학 졸업장을 가지고도 비정규직을 전전하게 되기도 하며, 잘나가던 자영업자도 아차 하는 사이에 부도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과도한 무한경쟁사회는 수많은 루저를 양산한다. 한 번 나락에 떨어진 자가 다시 재기하기란 갈수록 어렵게 되어, 사회적 보호대상자는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사회보장제도는 오히려 축소되고, 한국사회의 근본문제인 교육제도는 개혁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청소년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 노인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 청소년 5명중 한명이 우울증상을 보이며 자살 충동을 느끼는 나라가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사회에 비정상과 불공정이 만연하고, 시장질서에 암거래가 늘어나 불투명해지면, 개인은 더 많은 피해의식과 스트레스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된다. 친구보다 적이 많은 사회,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가 경쟁상대가 된 학교,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동종업계 회사가 서로 생존을 걸고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세상에선 편안하고 안전한 인간관계는 찾아보기 힘들고 모든 인간관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사회적 경쟁을 다그치고, 스트레스를 풀기는커녕 더욱 증폭시키는 장소로 변한지 오래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사회는 인간관계가 예민해지고 쉽게 피로를 느끼게 된다. 더구나 자유로운 소통이 막히고 언론통제가 심해지면 개인의 분노는 출구를 찾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답답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병증을 “인간관계 피로증후군”이라 부른다.

비좁은 지하철 공간에서 무더운 한여름에 내 육신의 열기가 이웃에게 폐가 되는 민망한 사회에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기 어렵다. 끝 모르는 수주경쟁에 내몰린 대기업의 전문경영인 CEO들의 40%가 남몰래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한국사회에 광범위한 “인간관계 피로증후군”을 볼 수 있다. 어디에도 안전한 인간관계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속적인 고강도의 스트레스 누적사회는 사회발전을 저해하며,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를 요구하여 전체적으로 불행한 사회가 된다. 작은 일에 짜증을 내며, 억압된 감정이 타인에게 분노로 표출되면 살인을 유발하고, 자신에게 표출되면 자살로 이어지게 된다. 생태심리학적으로 보면 살인과 자살은 동일한 인간 내면의 우울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인간관계의 본질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회적 공간을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 시장논리에 내재된 폭력성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의 생태주의 철학에 근거한 교육제도와 사회제도의 개혁과, 정치와 자본의 도덕성 회복만이 이 사회적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길이 될 것이다.

 

 

 

권오병 집필위원(아썸 대표·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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