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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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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2021.08.17 03:00 입력

 

 

모든 이론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론을 들자면, 단연 음모론이다. 나에게 혹은 세상에 일어난 여러 현상의 이면에는 어떤 의도를 가진 세력의 어두운 음모나 계획이 있다는 이론이다. 책상 위 볼펜이 없어진 것은 공부를 방해하려는 경쟁자의 술책이다. 지구 온난화는 프리메이슨의 세계 통제 수단이다. 코로나19는 백신으로 인간 정신을 조종하려는 일루미나티의 계획이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음모론은 인기가 많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물론이고,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불행을 완벽하게 설명해준다. 게다가 마음에 큰 위안을 준다. 최소한 불행의 원인은 내가 아니다. 음모론자는 ‘내 탓’이라는 말에 인색하다. 불행은 항상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음모론의 테마는 다양하지만, 플롯은 어찌 그리도 서로 비슷한지.

 

편집성은 도대체 어떻게 진화한 것일까? 위안이야 얻겠지만, 매양 의심하는 마음이 건강할 리 없다. 의심이 많으니 친구도 애인도 없다. ‘인싸’ 음모론자를 본 적 있는가? 남 탓만 하니 반성도 발전도 없다. 백신 접종도 꺼리니 아마 사망률도 높을 것이다. 좀처럼 좋은 점이 없다. 이거 왠지, 편집증 자체도 악의 무리가 퍼트린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단지 괴상한 정신병리일까? 그동안 편집증 환자를 제법 많이 만났는데, 사실 진료대 이쪽저쪽에 다 있었다. 의사나 환자나 마찬가지다. 편집성은 인간다움의 기본값이며, 우리는 타고난 의심쟁이다. 다만 날뛰는 편집성을 이성의 얇은 막이 살짝 덮고 있을 뿐이다. 이성의 막이 벗겨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울증도 있고, 약물 남용도 있고, 치매도 있다. 심지어 잠만 좀 못 자도 편집성이 왈칵 뛰쳐나온다.
 

혹시 동물도 편집증을 앓을까? 침팬지 무리의 습격을 편집적 행동으로 보는 주장이 있지만, 소수 의견이다. 많은 학자들은 인과적 추론 및 언어, 공감 능력이 편집성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믿는다. 일루미나티를 믿는 고양이나 백신을 거부하는 염소는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인류만 음모론을 믿기로 한 걸까?
 

최근 한 진화의학적 주장에 따르면, 편집증은 사회적 연합에 의한 결과다. 인간 세상에는 일대일 대결보다 다대다 대결이 흔하다. 동맹과 연합은 승리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맹이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배신과 기만의 위험도 있다. 개인으로서는 집단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리더가 ‘앞으로 돌격!’을 외쳤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괜히 돌격했다가 나만 죽는 것은 아닐까? 우리 동맹은 이길 수 있는 걸까?
 

이 가설에 의하면 연합 수준의 위협 상황은 편집적 귀인 사고를 활성화시키는 원인이다. 조직폭력배나 전투 군인이 편집적 정신장애를 자주 앓는 이유다. 소수 집단의 구성원이 더 높은 편집성을 보이는 원인도 마찬가지다. ‘소수’ 집단이라는 말 자체가 자기 연합의 위기를 뜻한다. 약속한 승리가 지연되거나 외부의 위협 세력이 점점 커져도 마찬가지다. 편집성의 진화에 관한 연합 위협 가설이다.
 

코로나19 유행이 벌써 20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방역을 위한 결속을 강조하고 있지만, 상황은 되레 악화되고 소외받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편집성이 꽃피기 딱 좋은 조건이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집단적 음모론이 득세하고,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비화할 것이다. 양차 대전을 비롯하여 인류사에서 무수히 반복된 일이다.
 

편집성은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의심을 버리라’고 설득해봐야 효과가 없다. 논리적 반박이나 집단적 무시, 사회적 비난도 금물이다. 도리어 음모론을 확신시켜주는 증거로 읽힐 것이다. 연합의 위협, 즉 고조된 집단적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 희생적 동조에 기반한 방역은 효과적이지만,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의심하는 이가 확진자보다 더 빨리 늘어날 것이다. 거시적인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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