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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새벽과 지영의 생사를 가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Winnipeg101 LV 10 22-11-21 240

*이 글은 <오징어 게임>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오징어 게임>에 대한 작품 리뷰가 아니며, 작품 내 캐릭터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입니다.

 

 

비슷한 연령대(20대 초중반으로 추정)에 흔치 않은 고난을 겪어 온 과거사까지, 언뜻 매우 비슷해 보이는 두 명의 여성.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새벽과 지영은 무심한 외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동질적 또래 집단으로 쉽게 묶일 수도 있는 캐릭터들이다. 과거의 고난이 이 젊은 캐릭터들의 그늘진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부분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매우 유사하다. 또한 둘은 과거의 고난으로 인해 인간, 나아가 기성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일반적인 또래 친구 관계로 지낼 시간이 충분치는 못했지만, 게임의 규칙이 공개되기 전까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짝을 지어 한 팀으로 경기를 하는 줄 알았던 구슬치기에서 이들이 한 팀이 되는 것은 플롯상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막상 서로 한 팀으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같은 팀원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게임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새벽과 지영의 생사는 극적으로 갈린다. 새벽은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한다. 그러나 지영은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양심이나 도덕심 등과는 무관한 결정이다. 새벽은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페어 게임에서 벗어나 지영의 생존권을 부당하게 빼앗을 생각까지는 없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구슬을 제대로 던지지 않은 지영에게 화를 내며 구슬을 다시 제대로 던지라고 요구하지만, 지영은 자신의 의지로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는다.

 

도식적인 대조이긴 하지만, 새벽과 지영의 차이는 사람이 경험하는 고난의 종류에 따라 이후의 정신 상태 및 삶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느냐를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반영한다. 새벽과 지영은 모두 괴롭다는 면에서는 동일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겪은 고난은 질적인 면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새벽이 경험한 고난이 가족 단위 외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지영의 고난은 가족 내부에서 발생했다. 둘이 겪은 일 중 어떤 것이 더 힘든지를 양적으로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왜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삶에 대한 의욕이 현저히 떨어지는지는 이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가족 내부에서 발생한 고난은 경험자의 생존 의지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고, 외부에서 발생한 고난은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가족 내부에서 발생한 고난은 자아 정체성 자체를 손상시키는 경향이 있다. 특히 경험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더하다. 보호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은 아이는 부모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며, 따라서 본인이 부당한 일을 겪고 있는 현 상황이 비정상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가장 가까운 보호자로부터 받는 것이 괴로움밖에 없기 때문에 삶의 기쁨이나 즐거움으로부터 원천 차단된다. 아이는 사회에서 자립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가정 내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므로 어느 쪽으로도 탈출이 불가능하다. 당연히 삶의 의욕이 생길 수가 없다. 어느 정도 개별적인 자아상이 건강하게 완성된 이후에 발생하는 가족 내 고난은 그나마 낫지만, 한국처럼 혈연에 집착하고 가족을 연좌제식으로 묶어 생각하는 나라에서는 성인조차도 가족과 자신 사이의 경계를 짓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이러한 정체성 손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피아 식별이 안 되는 안개 속에서는 싸움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가족 내부의 고난은 극복을 위한 그 어떤 행동도 애초부터 용납되지 않는 무력한 상황으로 사람을 몰아넣는다.

 

반대로 외부에서 유래한 고난은 삶의 의지 자체를 꺾지는 못하며, 오히려 삶의 의지를 더 불태우게 하는 경우도 많다. 전쟁 상황에서 자살자가 오히려 줄어든다는 통계는 외부적 압력이 내면의 자유의지와 어느 정도 작용-반작용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우울증이 심해 자살 충동이 강한 사람이라 해도 남의 손에 의해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내 목숨을 내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괜찮아도, 남이 함부로 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로서는 당연한 본능이다. 외부적 고난은 경험자의 자아 정체성 자체를 손상시키지는 못하며, 경험자는 자신과 고난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인식한다.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 것인지, 어디로 탈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 자체를 찾을 수 없는 내부적 고난과는 달리 누구와 연대해서, 무엇을 극복하고, 어디로 탈출해야 하는지가 명확하므로 극복을 위한 행동에 나서기가 훨씬 쉽다.

 

고난은 함께 나눌 상대가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탈출할 수 있는 외부 세계(희망)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천차만별의 경험이 된다. 결과적으로 어린 시절 경험한 고난이 가족 외부에서 발생했는지, 내부에서 발생했는지에 따라 경험자의 정신 건강에는 큰 차이가 발생한다. 외부적 고난이 아이의 회복력으로 극복 가능한 일회성 사건에 불과하다면, 내부적 고난은 아이의 회복력 자체를 근본부터 망가뜨리는 독극물을 주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흔한 통념에 따르면 사회는 정글, 가정은 휴식처라고들 한다. 그런데 가정이 지옥이라면 그 가정의 아이는 어디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어떤 위대한 인간의 강철같은 의지도 희망이 전혀 없으면 발휘되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극복해내는 사람들은 대개 남들이 못 보는 희망을 보고 있기 때문에 버티는 것이지, 절망감만 느끼면서도 ‘착하고 성실해서’ 마냥 버티는 것이 아니다. 자립이 불가능한 어린 나이에 의지할 곳도, 탈출할 지점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가정 내부에서의 고난은 많은 경우 인생 전반에 걸친 희망의 상실, 나아가 자기 혐오로까지 이어진다. 이는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인들이 부르짖는 ‘헝그리 정신’ 역시 고난이 철저히 외부의 것으로 인식될 때만 발휘된다.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직접 처단하기까지 했던 지영이 고작 구슬 하나 제대로 안 던지고 어이없게 기권해버린 이유는 나약해서가 아니라 삶의 희망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본인이 과거의 어떤 나쁜 경험으로 인해 삶의 의욕이 떨어진 상태라면, 먼저 자아 정체감의 경계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본인이 잘못한 것으로 인한 결과가 아닌 나쁜 일은 본인의 정체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관련된 사람들이 가족이라 해도 그들은 내가 조종할 수 없고 책임질 수 없는 별개의 인간들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생물학적으로 어떤 관계인가와 무관하게 본인이 싸워야 할 적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본인이 초래한 상황이 아닌 모든 상황은 본인에게 해결의 책임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분명히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이를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와 외부를 분리하고 피아를 먼저 식별해야 극복을 위한 싸움도 가능하고 상황 탈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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