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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비자 - 스기하라 지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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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tory.kakao.com/ch/saetbyul/DNT03kDjJH0

 

일본인 쉰들러로 불리는 스기하라 지우네(杉原千畝)는 전통적인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1919년에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를 중퇴하고 1924년 외교관이 된 해에 동방정교회로 개종했다. 
 
1939년 제2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러시아와 인접한 리투아니아의 일본영사관 영사대리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유대인 난민들이 영사관으로 몰려온다. 당시 리투아니아를 점령하고 있던 소련은 각국 영사관, 대사관의 폐쇄를 통지했으나 일본영사관은 마지막 순간까지 비자발급 업무를 계속했다. 
 
조국 폴란드에서 탈출한 유대인 난민들은 하루에 100여명씩 일본영사관 앞에 모여 일본 통과 비자를 발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스기하라 씨는 즉시 외무성에 비자발급 허가를 요청하는 전보를 쳤으나 세 번 모두 묵살당한다. 
 
그대로 두면 그들은 모두 수용소에 끌려갈 것이다. 인도주의에 입각할 것인가, 정부의 훈령에 따를 것인가, 마침내 그는 본국의 명을 거슬러 비자를 발급해 주기로 결심했다. 사람의 법보다 양심의 법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소련 정부와 본국 일본에서 거듭된 퇴거 명령을 받으면서도 스기하라 부부는 베를린으로 옮겨가는 9월 초까지 28일간 하루 20시간씩 비자를 직접 쓰고 도장찍기를 반복하며 팔이 굳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자격조건을 대폭 완화해 무자격에 가까운 사람들까지 받아들여 막판에는 하루에 300장 이상 발급하기도 했다. 또한 영사관이 폐쇄돼 리투아니아를 떠나는 순간에도 열차안에서 비자를 발급했으며, "죄송합니다. 더 이상 쓸 수가 없어요. 여러분의 무사를 기원합니다"라고 머리숙여 사과하고 자신의 서명과 낙관만 찍고 서류와 도장을 밖으로 던져 유대인들이 비자를 완성하도록 했다.그 기간 동안 발행된 비자 수는 번호를 붙여 기록에 남은 것만 해도 2139장에 이르며, 도중에 기록을 그만두었으므로 실제 발행된 비자와 도항 증명서는 그 밖에도 수천 장에 이를 것이라 보기도 한다. 또 가족 가운데 1장의 비자만 있어도 가족이 모두 건너갈 수 있었으므로, 이런 점을 감안하여 스기하라의 도움으로 국외탈출한 유대인 수를 약 6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탈출에 성공한 유대인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일본 쓰루가(敦賀)에 상륙하여 유대계 러시아인의 공동체가 있었던 고베시에 다다랐다. 그들 가운데 1,000명 정도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으로 떠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에 상하이로 송환될 때까지 일본에 남아 있었다. 상하이에도 유대 난민 공동체가 있어서, 그 곳에서 유대인들은 일본이 항복하는 1945년까지 지내게 되었다
반면 리투아니아가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져 나치와 현지인들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은 2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편 스기하라 씨는 체코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중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후일 일본으로 송환되어 비자발급의 책임을 물어 외교관직을 박탈당하고 무역업 등을 하며 일본보다는 외국에서 오래 살아갔다. 
 
지우네로 인해 목숨을 구한 이들은 이후 끊임없이 그를 찾기 위해 일본 외무성에 그의 소식을 문의했는데 “해당자 없음”이란 답신만 돌아오던 차, 과거 난민들의 이후 소식을 걱정하던 지우네가 이스라엘 대사관에 자신의 주소를 남긴 것을 통해 그의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당시 생명의 비자를 통해 생존한 난민 중 한 소년, 니슈리(B. Gehashra Nishri)가 자라 일본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참사관이 되어 일본에 오자마자 지우네를 찾고 재회한 일은 유대인을 넘어 많은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니슈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유대인 사회에서는 지우네에 대한 감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됐으나, 정작 일본 내에서는 악의에 찬 중상과 냉담한 반응이 이어졌다. ‘스기하라는 유대인들에게 돈은 받고(비자를 발급) 했으니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옛 외무성 동료들 사이에 파다했고, 일본 정부는 상부의 지시를 거스르고 선행을 베푼 그의 ‘하극상’을 기화로 공적에 대한 감사를 외면했다. 이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한 일본 주재 독일기자 게르하르트 덤프만은 국가명령을 저버리고 수천의 생명을 구한 그의 이야기를 세계 각국에 소개했고, 2년 뒤인 1983년 후지TV에서 ‘운명을 나눈 1장의 비자-4,500명의 유대인을 구한 일본인’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그의 업적을 다루면서 지우네 본인과 부인 사치코 인터뷰를 통해 당시 심경과 현재의 생활상을 소개했다. 
 
1985년 이스라엘 정부는 그에게 야드바셈상(유대인 학살을 추도하며 수여하는 ‘의로운 이방인’ 상)과 ‘열방의 의인’이란 칭호를 수여했는데, 수상 메달에 새겨진 문장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로, 탈무드의 한 구절이었다. 같은 해 11월엔 예루살렘의 언덕에 기념비가 세워져 그의 공적을 기렸으나 지병으로 이를 지켜보지 못한 지우네는 이듬해인 1986년 심장병으로 86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그의 명예 회복에 입장을 표한 것은 그로부터 14년 뒤인 2000년, 외무장관 고노 요헤이의 연설을 통해서였다.  
 
“지금까지 외무성과 고 스기하라 씨의 가족 여러분 사이에 무례함과 명예에 관한 의사소통이 부족했던 점을 외무 장관으로 이 기회에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일본 외교에 종사하는 책임자로서 외교 정책의 결정에 있어 어떤 경우에도 인도적 고려는 가장 기본적이고 또 중요한 것이라 저는 느낀 바 있습니다. 고 스기하라 씨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따른 극한적 상황에서 인도적이고 용기 있는 판단을 함으로써 외교관의 인도적 입장의 중요성을 보여줬습니다. 저는 이런 훌륭한 선배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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