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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1세대 이민자 안재창 (2) '이민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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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5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은 1902년 미국 하와이로 가는 첫 번째 이민선에 올랐던 안재창 두 번째 시간으로 한인 이민자 모집 과정과 첫 번째 이민선에 오른 안재창의 이민 동기에 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노년의 안재창. (나무위키)

 

노년의 안재창. (나무위키)

19세기 말부터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을 찾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멀리 조선에 있는 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한인들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당시 조선에 있던 미국 선교사들의 한인들에 관한 평가가 한몫했습니다.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선교사들이 한인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설명합니다.

 

[낭독: 광고문] ​“1890년대 중반에 조선에 와서 선교를 한 미국 선교사들은 한인들을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이고 참을성이 많고 근면하고 오랫동안 상류계급의 억압을 받아 순종적이며 중국인보다 가르치기 쉬운 민족이라고 봤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피조물이고 평등하다는 평등 사상은 조선인들을 열광하게 하였고, 그동안 지켜 오던 전통적 방법을 주저 없이 내려놓고 열심히 서양식 방법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한인 노동자들을 데려오기로 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주협회는 이를 주한미국공사인 호러스 앨런에게 부탁했습니다. 이에 앨런 공사는 조선 고종 황제에게 하와이 이민을 진언했고, 고종 황제는 1902년 11월 16일 한인들에게 여행권 발급 업무를 담당하는 유민원을 궁내부 산하에 만들라는 칙령을 내림으로써 하와이 이민을 마침내 승인했습니다.

 

한인들의 초창기 하와이 이민을 도운 호러스 앨런. (위키피디아)

한인들의 초창기 하와이 이민을 도운 호러스 앨런. (위키피디아)

 

한편 하와이 이민 모집 및 송출 사업의 전권을 부여받은 미국인 사업가 데이비드 데쉴러는 첫 단계로 조선에 동서개발회사와 데쉴러 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이 데쉴러 은행에는 입금자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주협회만 존재했습니다. 협회는 한인 이민자들을 하와이로 데려가는 경비를 지불하기 위해 데쉴러 은행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동서개발회사는 먼저 인천 내리교회의 조지 허버 존스 목사에게 부탁해 내리교회 청년회 회원들을 고용한 뒤 전국에 지사를 세우고 하와이로 건너갈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동서개발회사는 다음과 같은 광고물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과 인근 장터에 내걸었습니다.

 

[낭독: 광고문] 하와이 군도로 누구든지 일신이나 혹 권속을 데리고 와서 주접하고자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편리하게 주선함을 공고한다. 기후는 온화하여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음으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하다. 학교 설립 법이 광대하여 모든 섬에 다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아니한다. 농부를 위하여는 매년 어느 절기든지 직업 얻기가 용이한데 신체가 강건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은 여일하고 장구한 직업을 얻기 더욱 무난하고 법률의 제반 보호를 받게 한다.

이 광고문은 또 하와이에서 일하면 받을 수 있는 품삯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낭독: 광고문] 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매삭 15원(일본 금화 30원, 대한 돈으로 57원 가랑)씩이요,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간 동안이요, 일요일은 휴식한다. 농부의 유숙하는 집과 나무와 식수와 병을 치료하는 경비는 고용하는 주인이 지급하고 농부에게는 받지 아니한다.

 

동서개발회사는 각 지역에 하와이 이민 광고를 붙이고 한 달 동안 이민자 모집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결국 1명도 모집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생활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한 달 동안이나 가야 하는 하와이로 떠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 나중에 돌아오기도 쉽지 않은 데다 조상 산소를 버리고 처자와 이별하고 간다는 것은 경거망동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데쉴러는 이민자들을 모집하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자 친구인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에게 사람들을 설득해 달라고 다시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한국어가 유창했던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민을 권했습니다.

 

[낭독: 존스 목사] 여러분! 하와이 날씨와 풍경은 정말 좋습니다. 거기에 하와이에 가면 기독교인인 여러분도 스스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할 기회도 가질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존스 목사의 권유로 교인들 가운데 약 50명이 자원했습니다. 거기에 인천 항구 노동자들 20여 명과 바다에 익숙한 강화도와 교동 사람들도 하와이에 이민을 떠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이 약 120명이었고, 이들은 형식적인 신체검사를 거쳤습니다.

데쉴러가 처음으로 모을 수 있었던 한인 이민자 중 몰락한 양반의 자식이었던 안재창이 있었습니다. 한인 이민사 전문가인 안형주 씨는 안재창이 농토도 없이 고달픈 삶을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농사꾼으로 몰락한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불암산 밑에 살던 양반집의 7남매 중 여섯 번째로, 아들로는 네 번째로 태어나서 물려받은 농토도 별로 없고 토질이 백사라서 농사가 안 되는 살기 어려운 가난한 마을에 1873년 10월 19일 출생했습니다.”

 

이렇게 안재창은 궁벽한 곳에 태어났지만, 인천으로 시집간 둘째 누나 덕에 당시 신문물의 관문이었던 인천에 자주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안재창이 인천을 드나들면서 개화에 눈을 뜨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그의 둘째 누님이 인천으로 출가해 안재창은 1899년 경인선이 개설되기 전부터 한반도의 서쪽 관문으로 변모해 가던 인천을 드나들면서 양복을 입은 서양사람들, 검은 연기를 내뿜는 화물선을 보면서 세상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것을 점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개화와 신문물에 눈을 뜬 안재창은 곧 인생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만났습니다.

바로 내리교회에 다니던 조카 안창호로부터 하와이로 이주하라는 권유를 받았던 것입니다. 조카 안창호는 삼촌 재창에게 하와이 이민에 대해 돈을 벌 좋은 기회라면서 적극적으로 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이런 권유를 받은 안재창이 하와이 이주민 모집 광고를 보고 하와이로 이주하기로 했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안재창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교통비를 안들이고 들어가서 농장주가 마련한 집에 거주하며 일할 수 있고, 병이 남면 농장주가 고쳐준다는 광고를 믿고 하와이 이민선에 올랐던 것입니다.”

 

안재창은 3년 정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 훗날 한국으로 돌아와 일생 먹고 살 수 있는 전답을 장만할 수 있는 돈을 벌 꿈에 부풀었습니다.

 

또 하와이에서 돈도 벌고 개명한 서양문명을 접하며 기술을 익혀서 고향으로 돌아와 친척들과 편하게 여생을 보내겠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씨는 이렇게 안재창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이민선에 올랐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한인 이민사 전문가 안형주] “안재창은 인천 시냇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창영동에 가족을 두고 가난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로 결심하고, 한인들이 가보지 않은 중국인들이 ‘포와’라고 부르던 태평양 가운데의 섬, 하와이 군도에 가는 첫 한인 이민선을 탔던 것입니다. 이는 그의 첫 모험이었습니다.”

 

안재창의 유민원 ‘대한제국 해외여행장’은 1902년 12월 21일에 42번째로 발행됐습니다.

 

해외여행장에서 그의 신분은 평민으로 나이는 30세, 여행 목적은 농업에 종사하기 위해 미국 포와도에 가는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신원보증인은 그의 조카인 안창호이며 그는 상업에 종사하고 인천 내동에 거주한다고 기재돼 있었습니다.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 데쉴러와 통역 안정수와 정인수를 포함한 122명의 한인 이민자들이 몸을 실은 켄카이마루가 제물포항을 떠났습니다.

 

이 자리에는 민영환 유민원 총재를 비롯해 유민원 관리들과 존스 목사, 동서개발회사 직원들, 그리고 가족들이 선창에 왔습니다.

 

제물포항을 떠난 켄카이마루는 먼저 나가사키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한인 이민자들은 다시 신체검사를 받았고 이곳에서 20명이 탈락했고 나머지 102명이 태평양을 건너가는 미국 상선 겔릭호에 올라탔습니다.

 

‘인물로 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안재창’ 2편 한인 이민자 모집 과정과 첫 번째 이민선에 오른 안재창의 이민 동기를 보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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