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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2) '세 번의 결혼과 가족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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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8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 시간은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두 번째 시간으로 그의 가족생활에 관해 전해 드립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08년경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사진 제공: 이덕희 소장)

1908년경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사진 제공: 이덕희 소장)


고향 진주를 떠난 사진신부 천연희는 1915년 6월 20일 아침 미국령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배에서 내린 뒤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이민국 숙소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천연희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국제 관계로 남의 나라 백성을 이민해 오는 데는 이민국이 있어 모든 법률의 복잡한 사건을 이민국에서 다 처리하도록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처녀들은 이민 온 남자 이름으로 다시 이민 온 것이다. 그래서 그 남편 될 사람이 와서 데려갈 동안 이민국에 갇혀야 됐다. 이민국에서는 우리를 징역 사는 사람같이 대우하고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사진신부들은 남편이 올 때까지 입국심사도 보류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천연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민국에서 처음 대면한 남편 길찬록 씨의 인상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영감이 와서 내가 길찬록 씨라 하며 만리타국에 오느라 얼마나 고생하였느냐고 묻더라. 그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천지가 아득하였으나 내색하지 않고 큰마음으로 기도하고 꿀꺽 참았다. 이미 당한 일이니 할 수 없지만 내 운명만은 원망했다.

입국심사를 마친 천연희는 길찬록과 1915년 6월 29일 한인감리교회에서 홍한식 목사 주례로 다른 두 쌍의 신랑 신부와 함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 하와이에 건너온 천연희가 직접 목격했던 것은 당초 예상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이는 천연희 외에 다른 사진신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국 대진대학교 김지원 교수는 설명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와서 거주지의 현실이 예상과는 아주 달랐다는 것이 공통적이었어요. 대개 남편이 굉장히 가난했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고 나이가 많았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이주 동기를 성취할 여건이 되지 않았죠.”

하와이에서 결혼한 천연희는 남편 길찬록이 일하는 마우이섬 파이아에서 약 7년을 보냅니다. 파이아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유명한 곳으로 중국, 일본, 한국, 필리핀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길찬록은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옥표 명예교수는 당시 천연희가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연희 같은 경우는 상황이 열악했어요.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을 잘 못 하는, 술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일당 75센트를 월급 형태로 받는데 20일을 나가지 않으면 그걸 못 받는데, 천연희 남편 같은 경우가 대표적으로 매일 가서 출근부 도장을 찍지 않으니까, 월급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에는 정말 먹고 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죠).”

하와이에서 길찬록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과 저임금, 잦은 일자리 이동 등 열악하고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시달렸습니다. 또 음주 같은 길찬록 개인의 습성 탓에 가족 관계도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천연희는 남편 길찬록과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천연희가 남편과 이혼하기로 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세 아이의 교육 문제도 있었다고 문옥표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남편이 일을 못 하니까 당시 사회복지법에 따라 웰페어(복지혜택)를 나라에서 받는데, 이걸 받으면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중학교만 졸업하고 일을 해야 하는 그런 규정이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천연희는 아이들을 공부시키려 하는데 복지혜택을 받으면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니까 그게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죠.”

천연희는 결국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이혼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천연희는 29세의 젊은 남성인 박대성과 재혼했습니다. 남편은 미군 부대에서 세탁물을 점검하는 비교적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박대성과의 결혼 생활에서 천연희는 아들 해리, 딸 애들라인, 딸 루스를 낳고,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 메리도 키웠습니다.

그런데 결혼 초엔 가정 형편이 나아지는 듯했지만, 남편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여섯 식구 생계가 막막할 정도로 나빠진 적이 많아 천연희는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했습니다.

천연희와 박대성의 결혼 생활은 약 15년 동안 지속했습니다. 가족 관계가 악화한 결정적인 이유는 박대성이 딸 메리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은 딸이 대학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중학을 마치면 어디 가서 일하고 돈벌이하는 것을 원했다. 나는 그 목적이 아니었다. 내가 길찬록 씨와 이혼한 이유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공부시킬 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연희는 메리가 대학에 들어간 1938년경 두 번째 남편과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천연희는 두 번이나 이혼할 만큼 아이들 교육을 왜 그렇게 중요시 한 것일까요?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천연희는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인 2세든 하와이 원주민이든 누구나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신과 정부를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역적이 아닌 충성스러운 백성이 될 수 있다. 둘째, 한국이 신분과 예의만 중시하다가 백성들이 깨우치지 못하고 문명한 나라에 뒤처져 결국 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므로 교육이 필요하다.

두 번째 남편이었던 박대성과 이혼한 천연희는 여관업을 하다 알게 된 미국인 로버트 앤더슨 기븐 씨와 1941년에 결혼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인종 문제 때문에 이 결혼을 고민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동양인에 대한 미국 백인들의 배척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또 아이들을 위해 세 번째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나는 나이가 젊고 자식 다섯을 데리고 여자 혼자 사업을 해도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아이들이 다 어리고 공부시켜야 하므로 하루는 내가 우리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의향을 물어보았다. 아이들 대답이 어머니 생각대로 하라 하였다.

천연희는 다행히 세 번째 남편인 기븐과는 해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여관업과 농장일로 비교적 여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기븐은 1964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족들이 없고 이혼을 거듭한 천연희에게 자녀들은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연희는 자식들을 키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들이 원하는 대로 좋은 교육을 받아 부모 세대와 달리 떳떳한 미국 시민으로 살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천연희의 일생은 자녀들에게 바쳐졌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시에 이런 헌신을 통해 천연희는 더욱 강인한 어머니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연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하와이 사진신부 가정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고 대진대학교 김지원 교수는 지적했습니다.

“공통적인 특징은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형성한 가족의 형태가 달랐어요. 전통적인 조선의 가부장 제도하고는 달랐던 가정 형태를 이루었어요. 이 사람들이 굉장히 독립적인 핵가족을 이루게 돼요. 부부와 자녀만으로 이루어지는 핵가족이고 시댁이나 친정, 친척과의 교류가 없는 독립적인 핵가족이죠.”

김지원 교수는 또 이런 특성을 가진 가족 안에서 여성들의 역할도 많이 달라졌다고 지적합니다.

“그 안에서 젠더 역활이 굉장히 달라져요. 여성이 해야 할 역할이… 남편이 물론 가장이지만, 여성이 가족의 핵과 같은 존재로 새로운 역할이 많이 생겨요.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을 부부가 한다. 그리고 경제적인 역할이 중요해지고,자녀 교육... 정서적인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겠다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죠. 여성들이… 그리고 그런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네. ‘인물로 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하와이 사진신부 – 천연희’ 두 번째 시간으로 ‘세 번의 결혼과 가족 생활’에 관해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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