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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3) '경제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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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3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 시간은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세 번째 시간으로 그의 경제활동에 관해 전해드립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천연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중학교 졸업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소 소장).

천연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중학교 졸업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소 소장).


1915년 사진신부로 경상남도 진주를 떠나 하와이로 건너온 천연희는 남편 길찬록을 따라 마우이섬 파이아 농장 키카니아의 캠프 원에서 살았습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던 남편 길찬록은 하루 일당으로 75센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못 받는 날이 많았다고 한국학중앙연구소 문옥표 명예교수는 설명합니다.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을 잘 못 하는, 술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일당 75센트를 월급 형태로 받는데 20일을 나가지 않으면 그걸 못 받는데, 천연희 남편 같은 경우가 대표적으로 매일 가서출근부 도장을 찍지 않으니까, 월급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이 곤궁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갓 시집온 새색시인 천연희는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부업을 해서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감을 찾아 나섰습니다.

한국 대진대학교 김지원 교수는 천연희 같은 사진신부들이 이런 현실을 빨리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공통점은 결혼 직후부터 현실을 즉각 수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이죠. 여기에서…”

천연희는 농장에 들어온 지 석 달가량 지난 후부터 노동자들의 옷을 빨아 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바지 만드는 법을 배워서 바지를 팔고, 버선도 만들어 팔았습니다.

천연희는 1, 2년 터울로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식구가 다섯으로 늘자 그는 더 부지런히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노동자들에게 밥을 지어 주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한편 남편인 길찬록은 1922년 마우이섬을 떠나 오아후섬으로 갔으며 천연희도 마우이 생활을 정리하고 오아후섬으로 이주했습니다.

천연희는 남편을 따라 와이파후 캠프 파이브에 들어가 식당에서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이후 천연희는 미군 영지가 있는 와이히아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따로 살면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그는 같은 집에 사는 부인에게 군인복 만드는 일을 배워 바지는 1달러, 코트는 2달러씩 받고 옷을 만들어 생계에 보탰습니다.

이후 천연희는 무능력한 남편이었던 길찬록과 이혼하고 박대성이라는 29세의 젊은 남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미군 부대에서 세탁물을 점검하는 비교적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대성과의 결혼 초기에는 가계가 나아지는 듯했지만, 남편이 일자리를 잃어 천연희는 다시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933년 무렵 당시 부업을 전전하던 천연희는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호놀룰루 시내에서 건물을 임대해 세를 놓는 여관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여관업은 당시 한인들이 많이 종사한업종이었는데, 그들은 사업자금을 마련하려고 ‘계’를 만들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소의 문옥표 명예교수는 이 ‘계’가 이주 한인 여성들의 자구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나중에 여자들이 계를 조직해서 사업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큰 도움을 받아요. 계가 아주 중요한… 많은 여자가 교육도 받지 않고 은행의 문턱이 너무 높으니까… 여관업을 하거나 농장을 하거나 하면서 돈을 대출받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럴 때 계를 통해서… 패밀리 네트워크가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당시 한인 여성들은 이처럼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라는 관행을 잘 활용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던 한인 여성들에게 계는 유용한 창구였습니다.

직장이 확실하거나 은행 거래 실적이 좋거나, 신용이 쌓여 있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기에 한인 여성들은 본국에서 익힌 대로 계 조직을 이용해 사업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밑천 할 돈이 없어 은행에서 가서 돈 몇천 원 꾸려 하면 담보물을 잡아야 돈을 주고, 개인에게 주는 은행 돈은 좋은 일자리가 있어야 얻어 쓴다. 우리 형편으로 좋은 직업도 없고 유산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여자들이 신용으로 계를 모아서 누가 그런 집을 하면 계를 타게 하고, 다달이 거기서 나는 돈으로 자식들하고 먹고살고 계를 부어 나갔다.”

천연희는 점차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부동산업자 소개로 포트 스트리트에 있는 큰 집을 5년 동안 계약했습니다.

천연희는 이곳을 스탠다드 호텔이라 이름 짓고 큰돈을 들여 내부를 수리하고 가구를 넣어 세를 놓았습니다.

그는 또 1940년 사우스 베레타니아에 있는 구세군 건물 2층을 빌려 이를 독신 남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관으로 개조했습니다. 천연희는 따로 살림집을 내어 아이들과 살았고, 여관에는 아침 10시에 출근해 일을 보고 저녁에 퇴근했습니다.

천연희는 전쟁 시기인 이 4 ~5년 동안을 사업이 가장 잘된 때로 회고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내 사업은 나아졌다. 매일 밤 휴가 중인 군인들이 방을 가득 메웠다. 내 평생 처음으로 돈에 쪼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히캄 주택에 살았다. 주택은 버스 정류장에서 멀었지만 걸어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자가용이 없어서 모든 짐을 직접 들고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래도 만족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는 대략 1만 2천 달러를 모았다. 이 돈을 코코헤드의 카네이션밭을 임대하는 데 투자했다.”

이후 천연희는 여관업을 접고 카네이션 농사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몰래 카네이션밭에 제초제를 뿌리는 등 뜻하지 않은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난 탓에 천연희는 사업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천연희는 다시 호텔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50년 6월 퀸스 병원 옆 펀치볼 스트리트에 있는 호텔을 매입했습니다.

세 번째 남편 로버트 기븐과 딸 메리가 호텔 경영을 맡았고 천연희는 코코헤드에 있던 카네이션 농장 복구에 나섰습니다. 

시간이 흘러 천연희는 호텔업을 접고 코코헤드 일대에서 카네이션 농장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1969년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천연희는 특히 자녀 교육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록과 구술에서 이점을 누누히 강조했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 공부시킬 목적으로 내가 돈을 내 손으로 벌어서 내 자식을 공부시킬 생각이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자녀들을 잘 키우려면 그는 홀로서야만 했습니다. 가장이 되기로 하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느질이나 빨래, 식당일 같은 노동부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자금이 모이자 그는 새로운 사업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를 유능한 사업가로 만든 것은 자녀들에 대한 책임감이었습니다. 어머니이면서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야 했기에 그는 스스로 강하고 유능한 어머니상을 만들어 갔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소의 문옥표 명예교수는 하와이 사진신부 가정에서는 어머니의 경제력이 중요했다고 지적합니다.

“여성들의 경제력이 중요한 가정의 지위라 그럴까, 자녀들의 교육이라던가 이런 것에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죠. 천연희를 보면 그것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데요…’

여섯 자녀의 교육비는 물론이고 자녀들의 결혼과 출산 등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들은 어머니의 힘이 필요했고, 천연희는 자녀들의 보호막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손에서 일을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비바람을 막아 주는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천연희는 1969년 그의 나이 73세 때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경제활동에서 물러난 뒤로도 그는 간간이 공장에 나가 일하면서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는 고령에도 강한 어머니상을 유지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들을 위해 용감한 전사였던 천연희는 지난 1997년 101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하와이 사진신부 – 천연희’ 세 번째 시간으로 ‘천연희의 경제활동’에 관해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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