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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4) '사회참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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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0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 시간은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마지막 시간으로 그의 사회참여 활동에 관해 전해드립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효과 1) 잔잔한 분위기 음악 

1915년 6월 20일 하와이에 도착한 천연희는 이곳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하와이 한인 사회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후 그는 하와이 한인 사회에 깊은 관심을 두고 한인 교회와 한인 사회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고국에 있을 때도 12, 13세 때부터 교회에 나간 천연희는 하와이에서 첫 삶을 시작한 마우이섬에서도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922년 말 오아후섬으로 이주한 뒤에는 새롭게 개척된 한인기독교회를 다녔는데요. 이 한인기독교회는 이승만 주도로 만들어졌다고 명지대학교 김점숙 교수는 설명합니다.

//ACT 1 김점숙 명지대학교 교수//
“이 한인기독교회는1918년 12월에 이승만 주도하에 만들어졌습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새롭게 독립해 개척한 교회인데요. 당시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 지도자들이 굉장히 친일적인 발언과 행동으로 한인사회와 감정이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감리교 지도자들의 그런 친일적인 발언-행동으로 인해 ‘한인들이 스스로 독립을 해서 한인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생각을 했고, 그러한 일을 이승만이 1913년에 하와이에 도착하면서 구체화하게 됩니다”

천연희도 자신의 기록에서 한인기독교회를 다니게 된 이유를 이곳이 독립적이고 민족적인 성격을 띤 교회라고 생각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시사했습니다.

(낭독 1 – 천연희)

이 교회는 한국 사람의 독립교회로 한국 사람이 자치로 해 갔다. 예수교 선교부에 1년에 내는 것은 내어도 누구의 절제도 받지 않고 우리 교우들이 재정과 모든 것을 자치로 하여 갔다.

(효과 2 – 잔잔한 음악)

천연희는 또 1924년 3월 18일 첫 남편인 길찬록과 이혼하면서 두 아이를 한인기독학원에 맡겼습니다. 김점숙 명지대학교 교수는 이 한인기독학원의 모체를 한인중앙학원이라고 설명합니다.

//ACT 2 김점숙 명지대학교 교수//
“한인기독학원의 출발은 ‘한인중앙학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한인중앙학원은 1906년에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 만든 이 ‘한인기숙학교’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한인기숙학교를 운영하던 와드먼 감리사가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인들이 와드먼 감리사에게 반발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와드먼 감리사는 이승만에게 한인기숙학교에 취임해 달라고 요청했는데요. 이와 관련해 다시 김점숙 교수의 설명입니다.

//ACT 3 김점숙 명지대학교 교수//
“그러한 상황에서 1913년 2월 3일에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와드먼 감리사가 이승만에게 한인기숙학교 교장에 취임해 달라고 요청하고, 그래서 1913년 8월부터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한인기숙학교 교장이 된 이승만은 이해 9월 학교 이름을 한인중앙학원으로 바꾸었고 이 한인중앙학원이 훗날 한인기독학원으로 이어집니다.

(효과 3 – 경쾌한 음악)

천연희는 자신의 기록에서 이승만이 발행하는 ‘태평양잡지’와 국민회 기관지인 ‘국민보’가 배달되는 날을 기다렸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하와이 한인사회와 고국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천연희는 시종일관 당시 하와이 한인사회 지도자였던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따랐습니다. 그는 애국 정신을 북돋우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침이 시의에 맞는다고 판단했고, 시종일관 이승만 지도하에 있던 단체와 교회에서 활동했습니다. 

반면 당시 국민회 주도권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대립하던 박용만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냈다고 명지대학교 김점숙 교수는 설명합니다.

//ACT 4 김점숙 명지대학교 교수//
“천연희는 박용만이 군무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했는데요. 여기서 얘기하는 군무라고 하는 거는 군사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군인을 양성하는 데 박용만이 주력을 했는데,천연희는 그것이 조국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일제의 압제하에있고 하와이의 다 늙은 사람들을 교육을 해서 언제 독립을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재정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천연희는 박용만이 지방열을 부추기지 않고 민족의 단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애국자요 인도자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천연희는 이승만이 군무를 중시하는 박용만과는 달리 정치와 교육, 그리고 종교 방침으로 일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편 천연희가 하와이에 도착했을 당시 하와이 국민회는 이미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와이 국민회에 관해 천연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낭독 2 – 천연희)
우리가 외국에 와서 나라가 없는 백성이니 다른 나라 사람에게 피해를 보아도 호소할 길이 없으니 우리 해외 동포들이 단합하여 우리 한국 백성의 의회, 한국 백성의 국민회를 조직하고 이름을 국민회로 하고 이 나라 정부로부터 인장을 받았다. 그래서 하와이에서는 국민회가 한국 민족 단체회였다.

천연희가 하와이 국민회에 직접 참여했는지는 다른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기록 곳곳에서 자신이 하와이 국민회 지지자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천연희는 하와이 국민회를 미국에 이민 온 ‘한국백성의 의회’로 재미 한인들을 보호해 주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한국민족 단체회’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천연희는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하와이 국민회 통상회의가 조직화하는 과정과 절차, 국민회 지도부에 대한 생각, 그리고 국민회 내 분쟁 상황 등을 자세히 기록한 바 있습니다.

천연희는 또 1919년 3월 15일 여성 대표 41명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부인구제회를 조직하자 마우이섬에서 회원이 되어 평생 대한부인구제회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대한부인구제회의 주요 활동은 “구제금이나 구제 물품을 구하는 대로 한국에 보내는 것”과 서재필, 정한경, 이승만 등 “미국에서 외교 하는 분”들을 후원하고 “신정부에 외교 하는 경비를 부담하는”것이었습니다. 

대한부인구제회 회원들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베갯잇에 태극 수를 놓아 수봉하였”고 “떡 장사, 묵 장사, 대구 뜯어서 무쳐서 단지에 넣고 파는 장사”를 하고 “전쟁 밥”을 만들어 파는 등 다양한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천연희는 대한인동지회에도 참가하였습니다. 이 대한인동지회는 이승만이 제안해 설립된 단체였고, 천연희가 이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명지대학교 김점숙 교수는 설명합니다.

//ACT 5 김점숙 명지대학교 교수//
“대한인동지회는 1921년 6월에 이승만을 지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인데요. 단체가 만들어진 이래 천연희는 이 대한인동지회를 중심으로 해서 활동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한인동지회에서는 하와이 한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서 동지식산회사라는 것을 만들었는데요. 한인 98명의 투자를 모아서 이 회사가 출범했습니다.한 주당 가격이 100달러였는데 천연희도 이때 5주를 구입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통해서도 천연희가 대한인동지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연희는 어려운 이민 생활 속에서도 국민회와 대한부인구제회, 그리고 대한인동지회 등 각종 단체에 활발하게 참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활동이 천연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명지대학교 김점숙 교수의 말을 들어봅니다.

//ACT 6 김점숙 명지대학교 교수//
“천연희 같은 이민 1세대들은 한인 교회와 한인 사회단체에 참가함으로써생면부지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와이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는 한인 사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천연희를 그곳에서 고국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또 고국 독립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한인 사회단체에 참가함으로써 새로운 땅에 정착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망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따라서 그들이 미주 한인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그 중심에 한인 사회 단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하와이 사진신부 – 천연희’ 마지막 시간으로 ‘천연희의 사회참여 활동’에 관해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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