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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집단주의 인간관계

Winnipeg101 LV 10 22-03-03 441

2019. 12. 31. 2:43
 

 

심리학에서는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혹시 에리히 프롬 아시나요? 그 분이 이 분야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롬 이후로 여러 심리학자들이 인간관계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그 중에 George Levinger라는 분의 인간관계론이 가장 유명합니다.

 

 

 

레빈져의 인간관계론은 5단계로 나뉩니다. 서로 알아가는 단계(acquaintance), 관계를 쌓아가는 단계(build up), 지속화 단계(continuation), 악화 단계(deterioration), 종료 단계(end)의 다섯 단계가 있는데 다 언급할 생각은 없고 처음 세단계만 설명하겠습니다.

 

서로 알아가는 단계(acquaintance)는 서로 소개하고 자신을 보여주고 상대를 파악하는 단계입니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 어떤 것을 싫어하는가, 자신과 잘 맞는가, 맞지 않는가 등을 파악하여 관계를 더 가질지를 결정합니다. 이 단계에서 한국인들의 특징은 불필요한 외형적 특징을 파악하려 하고, 과거지향적인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키가 크시네요 키 얼마에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가족 관계는요?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직업은 뭐에요? 등과 같은 외형적 요소를 통해 상품적 특징을 파악하려 합니다. 또는 어느 학교 나왔어요? 고향은 어디죠? 어디서 일하셨어요? 등과 같은 과거지향적 질문을 하면서 아, 나 거기 알아요! 저랑 같으시구나! 식으로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나 이런 질문은 조금씩 할 수도 있지만 한국인들을 비롯한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의 내면 보다는 껍데기에 관심을 보이는게 역력히 느껴집니다. 

 

한국인들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뭔가 공통점을 찾고 죽이 맞겠다 싶으면 집적거리고 들이댄다는 점입니다. 한국인들 중에 좀 사교적이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십중팔구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과한 웃음을 남발한다든가, 괜히 수다스럽다든가, 괜한 질문을 많이 한다든가, 상대방의 말을 끊는 등으로 대화에 참견한다든가 하는 등의 참견스러운 행동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가 관계가 좀 맺어졌다 싶으면 "형이라고 불러도 되요?", "언니라고 불러도 되요?", "말 놓을께" 등의 방식으로 호형호제를 추구합니다. 특히 고려대학교 졸업생들의 경우 일단 고대 출신이라는게 확인 되자마자 "나 몇학번인데 말 놓을께"가 바로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고대출신이지만 고대생들 모임에 절대로 가지 않습니다. 아무튼,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이 호형호제 단계는 매우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쌓아가는 단계(build up)는 점점 가까워 지고 서로를 신뢰하며 만남과 연락을 반복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전단계에서 몰랐던 것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가면서 공통의 관심사와 목표를 공유합니다. 동일한 관심사나 목표가 형성되면 관계는 발달하고 지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관계는 정체되거나 끝나기도 하죠. 이 단계에서 한국인들의 특징은 이벤트나 단합대회 같은 것을 추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는 등산을 하지도 않던 사람들이 미국에 와서 같은 한국 사람 만났다고 등산 간다든지-뉴욕에는 산이 없어서 등산하려면 차 타고 한시간은 가야 되는데도 어떻게든 가더군요. 어떤 식으로든 이벤트를 만들고 억지로 사람 모으고 모임을 흥하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등산은 허울일 뿐 "묻지마 그냥 만나"라는 분위기라는 겁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사를 나누기 보다는 "부대낌" 그 자체가 목표라고 할 수 있죠.

 

세번째 심화단계(continuation)는 말 그대로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는 단계입니다.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고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한국인들은 심리적으로 "가족화"를 형성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이 모인 어떤 단체이건 "가족적인 분위기"라는 단어는 늘 등장합니다. 이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한국인들은 "민폐"를 아무렇지도 않게 끼칩니다. 아니 민폐를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이 정도 민폐는 끼쳐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윗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요구를 하고, 부모가 자식 대하듯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기도 합니다. 형제, 자매 대하듯 장난치거나 토라지거나 막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더 이상의 타인에 대한 존중 따위는 없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민폐를 끼칠 수도 있는 부탁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득볼 일이 없는 민폐를 끼치는 것은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쯤은"이라는 허세에 불가합니다. 예를 들면, 술자리에서 사람에게 장난치고 놀리는 경우라든지 상대방의 외모상의 핸디캡 같은 것을 걱정하듯 얘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미국에 와서 만난 한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중국인, 헝가리인, 일본인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한국인들의 관계는 지극히 외형적인 것을 중요시하고 만나서 하는 말과 행동도 부대낌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만나다 보면 깡통 같다는 생각이 들고 이렇게 부대끼다가 직장을 옮기거나 하면 순식간에 멀어지게 되죠. 왜냐? 부대낌 그 자체만을 추구하니 새로 옮긴 곳에서는 새로운 사람과 부대껴야 되니까요.

 

그렇다면 다음으로 왜 이런 한국인들의 집단주의 대인관계가 좋지 않은지에 대하여 써볼까 합니다. 사실 집단주의 대인관계가 위기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됩니다. 묻지 않아도 서로의 안위를 걱정해 주고 다독여 주면 위기 상황에서는 힘이 되죠. 그런데,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전쟁 났습니까? 보리고개인가요? 아니죠. 2020년을 바라 보고 있는 지금은 집단주의를 추구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위기 상황이 아닌 경우 집단주의는 인간관계 상에서 해가 됩니다. 

 

 

 

 

 

 

집단주의 인간관계는 어떤 점에서 해로운가?

 

첫째, 자아 정체성 상실

 

 

 

집단주의 인간관계의 가장 큰 문제는 타인에 대한 의존성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한국 사람들 정이 많다고들 하죠. 여기서 정이 많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서 설명을 해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 끼리만 비교해서 정이 많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해서는 그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정이 많다는 것이 인간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건 분명 아닙니다. 휴머니즘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다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이 많다는 것이 인심이 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심이 후한 사람은 전세계 어디에나 있습니다. 미국에 자전거 대륙 횡단 여행 왔다가 지나가는 미국인들 도움 받았다는 사례를 보면 미국 인심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차 태워다 주고 그런 사례 많습니다. 그렇다면, 정이 많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의존성입니다. 한국에서 정이 많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상대방을 독립된 객체로 인정하지 않고 함부로 타인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고, 참견하고, 걱정하고, 집적거립니다. 그런 행동이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집적거림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집적거림에 호응하면 상당히 기분 좋아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기분이 상합니다. 어떤 사람은 토라지거나 화를 내는 경우도 있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정이 많다는 것은 타인 의존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타인 의존성이 높은 사람들의 사례 몇가지만 들겠습니다.

 

1.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자녀들이 어르신께 먼저 연락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연락이 뜸 하면 호통을 친다거나 연락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경우 : 본인의 정체성을 타인과의 연락을 주고 받는 것에서 확인함.

 

2. 매일 보는 사람이 갑자기 외모가 바뀌었을 때(새로운 옷을 입었을 때,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했을 때, 안하던 화장을 했을 때 등) 호들갑스럽게 관심을 보이고 상대방이 같이 호응하면 기분이 좋아서 함께 수다를 떨고, 상대방의 반응이 그저 그럴 경우 갑자기 안색이 변하는 경우 : 본인의 정체성을 타인의 반응에서 확인함

 

3. 주말에 약속을 잡지도 않았는데 혹시나 애인이 만나자고 연락할지 몰라 화장을 하고 기다리다가 저녁 무렵에 안부 전화가 왔을 때, 전화를 끊고 화장을 지우는데 눈물이 나더라는 여자분 : 애인의 데이트, 연락 등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함

 

4. "오늘 회식이다" 예고도 없이 번개 회식을 통보하고 부하직원들을 모아 놓고 껄껄 거리며 일장연설을 하면서 즐거워 하시는 부장님 : 직원들이 회식 자리에서 자신에게 굽신거리는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함

 

5. 함께 모여 수다 떨기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유난히 자기 과시적이거나 타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 분위기 띄우려고 애쓰는 사람, 시시껄렁한 유행어 사용하면서 웃기려 드는 사람, 유난히 타인에게 추근 거리는 사람 : 집단화 한 다음에 모임의 주도권을 쥐고 타인의 관심을 끄는데 본인의 정체성을 확인함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보통 정이 많고 싹싹하고 싸가지 있고 발이 넓다는 한국인들이 대략 이와 같습니다.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대화의 내용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부대낌 자체에만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이 많다는 사람들이 대체로 타인의 반응이 좋지 않을 경우 맘 상하는 경우가 많고 누군가와 부대끼지 않고 혼자 있을 때 많이 외로워 합니다. 타인 의존적인 사람은 정체성이 없어서 혼자 있을 때 뭘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둘째, 협소한 인간관계

 

 

 

집단주의 인간관계를 가지면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것 같죠?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 한국 사회에서나 해당하는 말일 뿐입니다. 의존성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상대방이 잘 반응하기 바라고 상대방이 한 말에 잘 반응을 하면서 유대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관계를 형성하다 보면 대인관계의 범위가 특정 집단 내로 협소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 어머니는 교회 권사님이라 교회 친구들이 많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좀 알고 지내시죠. 친지들 하고도 친밀하게 지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가 그걸로 끝입니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많지만 범위는 교회, 이웃, 친지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관계 상에 있어서도 부대낌-그것이 전부입니다. 한국말이 통해야 하고 집단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것이 저희 어머니의 인간관계 범주입니다. 종교가 다르다거나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은 사귀지 못합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멀리 떨어지게 되고 부대끼지 못하면 인간관계가 끝납니다. 이런 인간관계의 법칙은 모든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거의 비슷합니다. 직장에서 30년 근속 표창 받고 은퇴하신 우리네 아버지들도 은퇴 후 급속히 인간관계가 줄어들죠. 바쁘다, 돈 쓰기 싫다 등의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집단주의-부대낌만을 추구하며 살았기 때문에 부대끼지 않으면 멀어지는 것이죠. 나이 드신 분들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신적, 문화적 나눔 없이 무작정 부대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Out of sight, Out of mind가 됩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을 보더라도 한국인 커뮤니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 이상의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합니다. 한국인들의 인맥은 단일 민족끼리 끈끈한 것일 뿐 세계 무대에서 폭 넓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언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집단주의-의존성을 주고 받는 관계 때문에 빚어지는 문제입니다.

 

 

 

 

 

셋째, 협소한 문화생활

 

 

 

의존성이 강한 사람은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문화생활을 못합니다. 혼자서 밥을 먹는다, 혼자서 영화를 본다, 혼자서 등산을 한다, 혼자서 낚시를 한다, 윈드서핑 배우고 싶어서 혼자서 윈드서핑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혼자서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습니다. 정체성이 약한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으면 정체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설령 혼자서 무엇을 한다고 하더라도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삶이 풍요롭지 않죠.

 

 

 

 

넷째, 개인주의 사회와의 충돌

 

 

 

집단주의 사회와 개인주의 사회의 문화 충돌은 첨예한 문제입니다. 집단주의 문화권의 사람이 개인주의 사회로 왔을 때 괜히 사람 집적거리고 장난치다가 성희롱으로 고소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괜시리 추근거렸다가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내면 마음의 상처를 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국 남자들이 미국 와서 문화적 차이 때문에 외국 친구들 사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문화 충돌의 대부분이 개인주의-집단주의 문화 차이 때문에 발생합니다. 반대로 개인주의 문화권 사람이 집단주의 사회로 왔을 때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 본다거나, 외국인 출입금지, 택시 승차거부 등과 같은 배타적인 경험을 당한다거나, 단합대회나 회식을 강요 받고서는 불편 했던 경험도 많습니다. 모든 경우 개인주의 쪽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런 좋지 않은 경험을 겪은 사람들의 경우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서양인들의 경우 특히 한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좀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경우 일본인들과 비교하면 보다 집단주의적이고 중국인들과 비교하면 보다 소극적이면서 부정적입니다. 그리고, 단일민족이라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이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의 장점도 있겠지만 대인관계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한국인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집단주의 문화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응석-절제 문화의 차이도 크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이 개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세가지 입니다. 상대방과 부대끼고 싶은데 영어가 서툴러서 시도 조차 못하는 경우, 대화를 나누면서 공통점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해 재미를 못느끼는 경우, 집단주의 방식으로 치근덕거렸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시원치 않아서 실망하는 경우. 이 모든 것이 영어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응석-절제, 집단주의 문화 때문에 발생한 문화 충격입니다. 이런 문화 충격을 경험하게 되면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커뮤니티를 찾아 나섭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문화적으로 점점 고립되고 국제화도 어렵게 됩니다.

 

미국에서 취업 생활을 하다가 연차가 되어도 관리직으로 진급이 되지 않아서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얘기가 "미국 사회에도 나름 차별이 존재한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형적인 미국 기업의 구조를 보면 관리직은 거의 미국 백인 남성입니다. 그 밑으로는 인도인이 좀 많고 유럽계, 아시아계도 있고 다양합니다. 히스패닉과 흑인은 가물에 콩나듯 찾아보기 힘듭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구조를 보고 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차별 때문이 아니라 차이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이든 관리직을 맡는 사람은 해당 사회의 평균적인 문화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월한 문화, 열등한 문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리더는 해당 사회의 평균성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회의 평균적인 문화 중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며 대인관계 상에서 중요한 문화가 바로 개인주의 문화와 응석-절제 문화입니다. 미국인들은 개인주의 지수가 높고 사교적이고 자유롭고 방종적입니다. 이런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관리직에 적합합니다. 반대로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적이고 절제적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리더가 필요한 것이구요. 이런 차이 때문에 관리직의 경우 문화 적합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이에 대해서 깨닫고 문화적으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좀처럼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평균적인 미국인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관리직으로 부하직원을 관리하기가 어렵습니다. 뒤집어 얘기한다면, 한국의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에서 외국인을 관리직까지 진급시키는 경우가 몇이나 되던가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미국 기업들이 포용력은 더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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