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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가난한 白人들 이야기 - 트레일러 집과 애팔래치안 산맥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서

Winnipeg101 LV 10 01-27 234

http://m.monthly.chosun.com/client/amp/viw.asp?ctcd=&nNewsNumb=200107100058
 

이 진  

 

『에이브러햄 링컨 시절의 영어를 듣고 싶으면 애팔래치아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애팔래치아 산맥에 사는 가난한 백인들은 외부와 단절한 채로 산다. 백인 중에 순종이 많다는 것도 특이하다. 7~8代가 한 곳에서 이어서 살아온 이 가난한 백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한다. 월 스트리트에서 불안한 미래를 안고 사는 것과 맨발로 집 앞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것 중 어떤 것이 상대적 가난일까 하는…

죽을 각오로 찾아가는 「아메리칸 드림」 
  
  
  「중산층」이라는 말의 허구성처럼 「가난」도 상대적인 것이라 누가 그렇더라고 말하기는 참 힘들다. 집 세 칸 가진 자가 『나는 가난하다』 하면 그런 것이고, 사글세 사는 사람이 『나는 부자다』 하면 또 그런 것이니 말이다. 
  
  미국인들의 가난 또한 일단은 그렇게 단순한(?) 「유심론」의 한 맥락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미국에서 가난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소비 생활 패턴이 제3세계 여타 나라에서 보면 지극히 사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쿠바에서 뗏목 하나 타고 풍랑을 가르며 플로리다 연안으로 숨어 들어오는 이들이나, 한 달 동안 어선의 밑바닥에서 알렉스 헤일리 소설 속의 쿤타킨테 같은 생활을 감내하는 중국인 밀입국자들, 또는 2100마일에 달하는 멕시코와 미국 국경을 지키는 경비대에게 「사냥」 당하는 100만여 멕시칸들, 아니면 지난해만도 국경 사막을 마저 건너지 못한 채 중간에서 독수리 밥이 된 멕시칸 475명의 이름 없는 死體가 원했던 것은 오직 미국이라는 부자 나라에서 돈 한번 벌어보자는 것이었다. 
  
  「잡히지 않고」 일단 미국으로의 잠입에 성공하면 그들은 화장실 청소나 쓰레기 수거 등 잡역을 시작하고, 그렇게 해서 조금씩 돈을 모으면서부터는 고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척의 사돈에 팔촌까지 미국으로 유입시킨다. 그래서 현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히스패닉系 인구 수효만도 그 州(주) 전체 인구 수효의 40%를 웃돈다. 
  
  도대체 얼마나 좋으면 이 나라를 향해 돌진하는 밀입국자들의 각오는 죽음을 불사하게 되고, 화장실 청소 자리 「취직」도 행운으로 여기는 것일까? 
  
  미국 기자들이 그와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 불법 이민자들은 한결같이 『그래도 미국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답한다. 하루 최저 임금 3달러 40센트도 못 버는 100만이 넘는 멕시코인 등 南美(남미) 노동자들에겐 시간당 최저 임금이 5달러 15센트인 미국에서 일하는 게 好事인 것이다. 
  
  미국 사회의 최하층 노동 활동은 그렇게 유입된 이민자들의 전담거리가 되어 있으니, 사실 미국에서 이미 기반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 특히 백인들에겐 보이지도 않는 세상이기 쉽다. 
  
  
  「보지 않고 싶은 사람들」 
  
  
  『원한다면 이 나라에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철저히 안 보면서 살 수 있어요』 
  
  최근에 한 사교 클럽에서 만난 백인 중년 여인은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이란 가난한 사람들과 흑인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어차피 집이야 富村(부촌)이 따로 있고 貧村(빈촌)이 따로 있는 것이지만, 그녀는 아예 처음부터 그 「보지 않고 싶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집을 구했으며, 쇼핑몰을 정했고, 식당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말들에 익숙해져 있을 법한 미국 백인의 입에서 그렇게 노골적인 말이 나온 것은 아마도 그녀가 저녁 8시부터 시작되어 새벽 2시에 끝난 그 클럽 파티의 마티니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야박하기 짝이 없고 차별적으로 들릴 수 있는 그 「보지 않고 싶은 사람들」이 실은 이 글의 주제이다. 세계 최고 부자 나라 미국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의미일까? 그녀가 동네 이름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지나칠 일도 만들지 말라고 일러 주는 동안 나는 「미국의 가난」이 오히려 더욱 보고 싶어졌다. 
  
  
  좀더 좋은 것에 대한 강박관념 
  
  
  그것은 1990년대 미국 경제의 大부흥이 내게까지 나누어 준 약간의 「떡고물」 탓일 수도 있고, 미국 이민 역사책의 개요인 「정착 과정의 고통」을 별로 느낄 수 없었던 나의 행운(?) 탓이었을 수도 있다. 
  
  1890년대 봉제 공장에서 低임금 長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불구덩이에 휩싸여 떼죽음을 당했던 여성 이민자들의 역사 같은 것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형형색색의 열대어와 상어까지 구경할 수 있는 화려한 수족관이 직원들의 피로를 덜어 주기 위한 장식용으로 곳곳에 세워져 있는 회사에서 평면 액정 모니터 네 개를 책상에 두고, 허리를 편하게 해 준다는 1200달러짜리 의자에 앉아 일을 했으며, 연말이면 등이 깊숙하게 파인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뉴욕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200만 달러가 소요되는 파티에 나가 댄스를 즐길 수 있게 되자,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생활에 대한 위기감이 생겼던 까닭이었다. 
  
  나와 더불어 직장 동료들이 공히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는 이랬다. 직장의 소유주는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맨손으로 이룩한 미국인 巨富(거부) 반열에 오른 사람이고, 직원들은 대부분 자신들도 언젠가는 또 한 명의 巨富가 되겠다는 야망이 강한 일류 대학 출신들이었는데, 그들에겐 사원 복지 지원 정책들 중에서도 의료 보험이나 노후 연금 지원 등이 좋기로 이름 높은 그 회사에서 맛보는 여피적 삶의 쾌락이 크면 클수록, 낙오되었을 때에 대한 불안감 또한 대단히 높았다는 것이다. 
  
  회사 업무가 끝나고 저녁 무렵 술집에 모이게 되면 그런 걱정들은 여지없이 튀어나왔다. 주식 투자를 어떻게 해서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또는 잃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새로 구입한 집은 지리적 환경이 이러저러해서 얼마만큼의 투자 가치가 있다든지, 그런 소재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 분위기가 더 무르익으면 쏟아져 나오는 고민은 좀더 빨리 좀더 좋은 커리어를 구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관한 것이었다. 
  
  다우존스와 나스닥이 연일 상한가를 쳐대던 1990년대 말기, 정작 그 동네를 구성하는 젊은 직장인들은 낙오되었을 때의 두려움을 주가 상승폭만큼이나 가파르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강박관념의 주범인 「빈곤」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캘리포니아州만 해도 가난의 경계선 아래에 사는 사람들의 수효가 전체의 13.8%에 이른다고 하는데, 도대체 『돈이 너무 많아 문제』라는 미국에서 (물질적으로) 빈곤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말이다. 
  
  
  「백인 쓰레기」 
  
  
  미국은 어떤 개인을 가난하다고 규정할까? 
  
  미국에서는 1963년에 물가 상승률과 소비자 물가 지수들을 근거로 마련한 기준들을 가지고 「가난 경계선(poverty line)」을 그어왔는데 1963년 당시에 4인 1家口 기준 경계선이 年수입 3100달러 정도였다면 올해에는 年수입이 1만7029달러 이하인 家口를 극빈자 층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경계선은 州마다 조금씩 달라서 알래스카의 경우 2만2070달러까지 높이 잡아 놓고 있으며, 州정부에서 마련한 경계선 밑으로 내려가면 극빈자 층으로 여겨져 정부 보조 정책 시혜를 받게 된다. 이를테면 알코올과 담배를 제외한 음식을 살 수 있는 푸드 스탬프(food stamp)를 받을 수 있고, 정부 보조 임대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식료품점 계산대에서 현찰이나 카드, 쿠폰이 아닌 모양의 종이가 건네지는 것을 봤다면 푸드 스탬프를 봤기 십상이다(물론 그런 스탬프를 내미는 사람들에 대한 계산원들의 배려는 남들이 보지 않게끔 얼른 받아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 경계선을 잡는 기준들이 낙후되었다는 지적도 많이 나온다. 실제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더 큰 문제들은 年수입 정도보다는 장바구니 물가와 의료 혜택과 많은 관련이 있다. 특히 의료 혜택은 얼마나 좋은 보험에 가입되어 있느냐에 따라 치료 기회가 대단히 달라서, 클린턴이 퇴임 후 얼마나 오랫동안 퇴직 연금을 타게 될 것인지 계산하는 데에 중요한 변수가 되기도 했다. 
  
  연방 정부가 지급하게 될 퇴직 연금 기한을 클린턴이 82세가 될 때까지로 예측할 수 있었던 까닭이 그가 받게 될 의료 혜택의 높은 수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돈과 의료 혜택이 비례 곡선을 긋는다』고 할 만큼, 빈곤했을 때에 겪는 어려움은 바로 이웃 캐나다와만 비교해도 형편없는 실정이다. 
  
  암 전문의 제인 오우먼 박사는 『간단한 병 치료는 그렇다 쳐도 약값이 비싼 암 관련 치료는 절대적으로 개인의 富와 상관이 있습니다. 암과 관련하여 어떤 약은 한 달치가 2000달러가 넘는데 보험 회사 기준도 다르고, 특히 빈곤층일수록 혜택을 받을 수가 없으니 그런 사람들은 정말 약 한번 못 써보고 죽을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라고 했다. 
  
  이렇게 가난해서 죽음과도 가까운 미국의 빈곤층은 인디언, 흑인, 그리고 멕시칸계로 대표된다. 이 중에서도 일년에 100만 명 이상 미국으로 이주해 들어오는 멕시칸계는 가장 큰 빈곤 집단이다. 지난해에 PBS를 통해 보도된 헥터 갤란 감독의 다큐멘터리 「잊혀진 사람들」(Forgotten Americans)은 국경 지대 멕시칸들의 전기·수돗물 없는 생활을 다룬 것으로 그 절대적 빈곤 환경은 절망에 가깝다. 
  
  그 지역의 한 주민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살다 죽으면서 (자신도) 미국인이라는 것을 실감해 볼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How sad to be born here, live here all your life, die here and not know what it is like to be an American)』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3大 빈곤 집단을 위한 연방 정부 복지 후생 기금이 年1조 달러를 넘어서는 데에도 별 심정적 관심을 보이지 않는 미국의 소위 중산층 이상 사람들이 어쩌면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두 빈곤 집단이 있다. 하나는 「트레일러 코트 사람(trailer court people)」들이고 다른 하나는 「애팔래치안(Appalachian)」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백인들이다. 
  
  『그는 트레일러 코트에 살아』라거나 「힐빌리(Hillbilly) 사람」 「백인 쓰레기(White Trash)」 「크래커(Cracker)」 「늪에 빠진 양키(Swamp Yankees)」 또는 「빨간 목(Red Necks)」이라는 말은 모두 가난한 백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미국에서 백인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정신적 모멸감은 멕시칸 이민자들의 절대 빈곤에 대한 심각성보다 오히려 크다고도 할 수 있다. 「평등한 기회」가 주어진 나라라고 말들은 해도, 백인이어서 받는 우월적 혜택이 여전히 큰 곳에서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은 개인의 지독한 무능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생각들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졸업을 앞둔 미국 대학생들 중 절반이 『언젠가 백만장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현실과는 다름에도) 『그렇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富」는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 상황이니 이 나라에선 가난이 심지어 「죄」라고 여겨질 법도 하다. 
  
  
  트레일러 코트 사람들 
  
  
  먼저, 「가난한 백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대명사격이라 일컬어지는 「트레일러 코트」는 주로 남부와 서부 지역에 많이 있으나, 전국 어느 도시에 가도 볼 수 있는 情景 중의 하나이다. 토지 사용 제한 정책 때문에 도시 내부로는 못 들어가고 주로 외부 끝자락에 존재하는 트레일러 코트는 말 그대로 이동 주택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겉에서 보면 콘테이너를 연상시킨다. 미국의 일반 주택들과 달리 냉·난방을 바닥에서 하느라 트레일러 전체가 땅에서 1m쯤 공중으로 떠올라 있다. 
  
  좀더 자세한 이미지를 가져 보고 싶다면 영화 「남자는 울지 않는다」(Boys Don’t Cry)를 보기 바란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로 나오는 남자의 집이 트레일러의 전형이다. 그밖에도 카우보이 총잡이들을 소재로 하는 「웨스턴 무비」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무지와 폭력들을 소재로 하여 할리우드의 새 장르가 된 「서던 무비(Southern Movie)」들에 종종 등장하는 집도 이 트레일러들이다. 트레일러가 모여 있는 곳에는 그 주변에 폐차 처리 시설같이 고철 산업 쓰레기들도 많다. 
  
  백인들 중에 트레일러 코트에 산다는 것은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다 떨어졌다』는 소리와도 같다. 
  
  『맨스 클럽(Men’s Club:남자들끼리만 모이는 클럽) 친구들이 모두 박사 과정에 있는 백인들이었어요. 그런데 그 중 한 친구가 아내와 이혼을 한 뒤에 트레일러 코트로 옮겼다고 말하더군요.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어요. 그렇게 가난하지 않은 사람인데 그런 곳으로 옮기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더군요』 라고 말하는 아이오와州에 사는 제프 로널드씨는 그 뒤 맨스 클럽 사람들의 작은 가십거리는 그 트레일러 코트로 간 사람이 「도대체 왜 그랬을까」에 대한 구구한 억측이었다고 했다. 
  
  그 말고도 역시 아이오와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케이시 린든 부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트레일러 코트에 살았던 이야기를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다. 트레일러도 산 게 아니고 임대를 했는데, 한달 임대료가 200달러 정도여서 저축을 많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잠정적 파산 상태」가 된 이들 
  
  
  가난한 백인들은 둘로 나뉜다. 한 부류는 「현재」 가난한 사람들로서 때로 「잠정적 파산 상태」가 된 이들이다. 이들은 실직이나 학업 등의 이유로 경제 활동에 참가하지 못하면서 생활비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이지만, 그들에게 소위 백업 시스템이 있다는 것이 다른 한 부류와 다른 점이다. 백업 시스템이란 스스로 견디다 정 어려우면 의존할 가족, 친지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몇 달 전에 직장을 구하면서 대번에 연봉 8만 달러대로 진입한 뉴욕의 제임스 파커씨는 그 전에 거의 2년을 의료 보험도 없이 실직과 低임금 생활을 하면서 『나는 파산했어(I am broke)』를 연발했던 사람이다. 일상에서 생활비를 어떻게 줄이고 있는지, 집세 부담이 얼마나 큰지, 은행 융자를 얼마나 했는지, 구구절절이 늘어놓다가 『나이 서른 다섯이 되고 나니 이렇게 살다가는 가난을 면치 못할 것 같아 밤잠을 못 자겠다』는 하소연을 하곤 했었다. 
  
  그런 그도 실제에서는 정말 삶이 궁핍해져서 전기세를 못 낼 지경이 되면 도움을 청할 부모와 형제들이 있었다. 또, 박사 학위를 갖고 있으니 언제라도 일단 직장이 잡히면 생활 형편은 금세 나아질 수 있고, 아메리칸 드림의 티켓도 늘 볼 수 있는 자리에 놓여져 있었다. 결국 「파산했으나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부류에 속하는 이들인 것이다. 
  
  반면에 그 백업 시스템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요원한 것이기 십상이다. 트레일러 코트 주민들의 실상에 관한 통계 수치들은 그런 이유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최저 임금 이하의 생활자들 
  
  
  전체 트레일러 코트 주민들의 90% 이상이 백인이고, 그들 중 거의 50%가 25~44세 사이인 상황에서, 집 값은 일반 집들보다 훨씬 저렴하여, 1만 달러가 훨씬 안 되는 가격으로도 살 수 있지만, 그나마도 트레일러 코트는 임대인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형편이다. 트레일러 코트 임대주들은 대부분 외지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임대료를 내는 세입자들은 최저 임금 이하 생활자들인 것이다. 
  
  또 가난하면 은행 신용도 안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인 바, 그들이 은행에서 받을 수 있는 융자금에 대한 이자율은 보통 집을 살 때 매겨지는 7~8%대보다 적어도 5% 이상 높게 책정된다. 은행으로서는 떼일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높으니 좀더 높은 이자율을 적용하는 것이 당연한 생리일 것이나, 그런 이자율을 감당하면서 트레일러 코트에 집을 마련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을 빠져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길다 할 수 있겠다. 
  
  그래도 트레일러 코트 사람들의 소비 생활은 전적으로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도시인들과 사회적 교류 활동을 하며, 언젠가 그곳에서 빠져나가겠다는 의지도 있다. 「환상」이라고 한다 해도, 아메리칸 드림의 존재성을 믿는 이들인 것이다. 
  
  그러나 年수입이나 빈곤의 정도에서는 트레일러 코트 사람들과 같거나 낮으면서 생활 방식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소위 「애팔래치안」이라고 불리는 백인들이다. 
  
  <이것은 제드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그는 (애팔래치아) 산 속에 살며 가족들의 끼니도 거의 챙길 수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먹을 것을 찾아 사냥을 나선 도중 텍사스의 유전을 발견하게 되었어요/이제 제드는 백만장자가 된 것이랍니다/킨포크스는 『제드씨, 이제 이곳(애팔래치아)에서 이사 가세요. 캘리포니아가 당신이 가야 할 곳이랍니다』 라고 말했어요/그래서 제드는 트럭에 짐을 싸들고 베벌리 힐스로 떠나갔지요/힐스 그곳엔 수영장과 영화 배우들이 있죠/베벌리 힐빌리스가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1970년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TV 시트콤 「베벌리 힐빌리스(The Beverly Hillbillies)」의 타이틀 노래로서 지금도 미국인들이 흥얼거릴 수 있는 정도로 유명했다. 노래에서만도 애팔래치안이 猝富(졸부)가 되어 베벌리 힐스로 이사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에피소드들의 기본 맥락은 「가난뱅이 애팔래치안」들에 대한 조롱이다. 
  
  
  「얼굴이 비슷하고 성이 같은」 애팔래치안 
  
  
  애팔래치아는 지리상으로는 북부의 메인州에서부터 남부의 앨라배마州에까지 2000마일에 이르는 산맥을 이르지만, 실제로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조지아에 이르는 산맥 지대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19세기초에 이로퀴오스(Iroquois)族과 체로키(Cherokee)族들을 학살하거나 인디언 격리 구역으로 몰아낸 뒤에 정착한 스카티쉬 아이리시, 독일, 영국계 이민자들의 후예들인데, 『그는 애팔래치안이야』라고 하는 말에는 엄청나게 큰 가난과 무지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전형적인 경우를 설명해 보자면, 애팔래치안 남자들은 일단 먼지 묻은 러닝셔츠를 입었거나 아예 웃통은 벗었으며, 몸에 이러저러한 문신이 있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또, 수염을 길게 기른 데다 캡 달린 모자를 쓴다. 이 캡 모자도 운동 좋아하는 도시 사람들이나 게이들이 잘 쓰는 세련된 둥근 캡 모자나 야구 선수들 모자가 아니라 윗부분이 좀 각진 것이다. 
  
  한편, 여자들은 정돈되지 않고 긴 쑥대머리를 했거나, 농사를 많이 지어 허리가 굽었기 십상이며, 남-녀 모두가 요즘 미국 최대 골칫거리의 하나라 여겨지는 비만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래도 전자 제품이나 자동차 등 현대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는 빈도가 높고, 먹을 것이 풍부한 평지(?) 사람들보다는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고, 패스트 푸드의 「악영향」을 덜 받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들은 他地(타지)로의 이동이 적어 길게는 7~8代까지 한 집에서 살아왔으며, 일가 친척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성씨가 몇 개 안 되는 촌락을 이룬다. 게으르고, 고등학교 졸업자는 그나마 많이 높아져서 65%에 이르며, 잔인한 가정 폭력을 일삼고, 알코올 중독자가 많다는 것도 그들의 이미지인데, 거기에 소위 『그들은 얼굴이 비슷하다』는 말은 애팔래치안들을 두고 외지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슬픈 우스갯소리」이다. 근친상간이 잦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할로우(American Hollow)」는 앞서 말한 애팔래치안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秀作(수작)이다. 로이 케네디(Rory Kennedy)에 의해 수개월에 걸쳐 기록된 이 다큐멘터리는 내레이터의 설명 하나 없이 애팔래치안 보울링 가족과 그들의 친척, 친구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고 평가받았는데, 다큐멘터리 속에는 아내를 폭행하기로 동네에서 이름난 남자가 도시에 나갔다가 결국 강도 살해 범죄를 저질러 연행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그가 지금 체포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내가 그의 살인 대상이 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아내의 한숨 섞인 안도의 푸념이 나오기도 한다. 
  
  또, 열 일곱 살난 클린트 보울링은 고등학교에서 만난 여자 친구에 청혼을 하지만 결국 결혼식 당일에 나타나지 않은 신부에게 배신을 당하고 『돌아오지 않겠다』며 수차례 도시로 떠났다가 돌아오곤 한다. 이 청소년의 일상은 같은 동네가 아닌 곳의 처자와 결혼하기가 거의 힘들다는 것, 동기 부여될 것이 없으니 고등학교도 마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도시로 나갔을 때 적응이 거의 안 되어 결국 「힐빌리」로 되돌아간다는, 반복되는 그들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애팔래치안들을 달리 부르는 가장 흔한 말은 「힐빌리 사람들(Hillbilly People)」이다. 극우 공화당派 방송인이자 빌 클린턴 前 대통령을 극도로 싫어했던 러시 림보(Rush Limbaugh)는 클린턴이 주지사 활동을 했던 리틀 록(Little Rock)을 힐빌리 지역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이는 클린턴을 비하하기 위해 일부러 사용한 대단히 모욕적인 말이었다. 
  
  힐빌리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00년의 일로 앨라배마州 애팔래치아에 사는 백인들의 문화적 이질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애팔래치안들은 힐빌리 외에 「산사람(Mountainer)」이라고도 표현되어졌고, 남부 애팔래치안 산사람들(Southern Appalachian Mountaineer)이라는 뜻에서 샘(SAM)으로도 불려진다. 
  
  또 1900년대 초부터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들보다는 작가와 기자들의 글쓰기에서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데에 자주 등장함으로써 앞서 말한 전형적 이미지를 가지게 된 애팔래치안들은 「무법지대 사람들」이나 「정신 박약 개척자」(retarded frontier)로까지 표현되어지기도 했을 정도이니 미국에서 그들의 위치가 어떻게 점철되어 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애팔래치안이 가장 많은 켄터키 
  
  
  美 전역의 빈곤 계층 중에 4분의 1을 차지하는 애팔래치안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州는 단연코 켄터키이다. 켄터키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KFC 닭고기로 유명(?)하지만,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켄터키 더비」를 가지고 있는 경마의 고장과 더불어 애팔래치안이 많은 곳으로 더 유명하다. 미국 전역에서 가장 가난한 카운티 20개 중에 16개가 켄터키州에 있기 때문이다. 
  
  또, 美 전역의 빈곤 계층 중에 10%가 켄터키에 있다고 한다. 1901년에 지리학자 엘렌 처칠(Ellen Churchill)은 『미국 어디에도 켄터키 애팔래치아 산간 지대 같은 빈곤 지역은 없다』고 단언한 바 있고, 그곳은 폭력과 사회적 갈등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다. 그러니 미국인들이 켄터키라는 州의 이름만 듣고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이 극빈자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켄터키의 동-서-남-북 중 오직 동부 켄터키 지역만이 그 극빈자 지역으로 여겨진다. 테네시州의 내슈빌과 함께 남부 귀족문화의 産室(산실)이라고 여겨지는 루이빌은 켄터키 북부에 속하며, 중부나 서부 지역도 애팔래치아 산맥 언저리에 속하지 않는 터라 불명예 대상에서 제외된다. 오직 동부 켄터키 사람들만이 그 역사적인 빈곤 계층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代를 이은 만성 실업 
  
  
  그래서 켄터키 사람들은 아무도 나서서 애팔래치안들에 대해 언급하진 않지만, 그 부분에 대해 대단히 예민하다. 켄터키인들 중에는 자신을 소개할 때에 웃으면서 『내가 켄터키 사람이라고 해서 맨발로 다닐 거라곤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잖은데, 그 속에는 「나는 동부 켄터키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동부 켄터키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지는 애팔래치안들의 문화는 몇 가지 점에서 트레일러 코트 사람들과 매우 다른데, 그 중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배타성」이다. 오랫동안 도로가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외지인의 유입이 일단 적었기도 하거니와 도로가 많이 개발된 요즘에도 그들에겐 여전히 외부인들과의 교류를 꺼리는 배타성이 남아 있다. 그들이 「同시대인이면서 조상(Contemporary Ancestors)」이라 불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7~8代 이상 대대로 한 집안이 한 곳에서 생활하기도 하고, 사용하는 언어 또한 옛 것이 그대로 유지되어온 덕에 언어학자들은 『에이브러햄 링컨 시절 영어를 듣고 싶으면 애팔래치아로 가라』는 말을 할 정도이다. 
  
  그들의 배타성으로 인해 백인 순종이 많다는 것도 한 특징이다.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라고 하면 미국을 이끄는 상류 백인층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혈통과 종교적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로는 동부 코네티컷 지방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부자 와스프들보다 애팔래치안 와스프가 훨씬 많은 형편이다. 미국에서는 초기 청교도 정신이 점차 약해져가고 있고, 젊은층으로 갈수록 非종교인이 늘어가는 추세이나 애팔래치안들에게 신앙은 가장 큰 생활의 기준이 되고 있다. 
  
  트레일러 코트 사람들이 도시 외곽 지역에 살며 파트 타임으로라도 근로 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반면에, 애팔래치안들의 실업률은 그 지역 인구 대비 50%를 넘어선다. 석탄 매장량이 많은 애팔래치아 산맥에 1890년부터 1920년대까지 한때 광업의 발달과 함께 근로 활동을 할 수 있었을 뿐 그후로 다른 어떤 산업도 발달하지 않게 되자 만성 실업자가 代를 이어 나오게 된 것이다. 
  
  애팔래치안들의 절대적 빈곤은 역시 일자리가 거의 全無(전무)한 환경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마을에서 50마일 이상 떨어진 도시로 출퇴근을 하기도 하지만 교육 수준이 낮고, 전문 기술이 없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라는 것은 시간당 최저 임금 수준에다 파트타임 일들뿐이기 십상인지라, 버는 돈보다 자동차 유지비가 더 드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그나마 켄터키 애팔래치아 지역 사람들의 거의 「밥줄」에 가까웠던 담배 산업의 타격으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다.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에서 줄기차게 전개된 금연 운동과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한 피해 보상 소송의 최대 희생자가 애팔래치안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단 재배량이 예년에 비해 줄어들게 되자, 일자리가 줄어들었고, 담배 회사들이 소송에 따른 보상액 지불로 인한 피해분을 담배 값 인상으로 상쇄하려 하게 되자, 끽연가들인 애팔래치안들은 이래저래 더욱 주머니가 가벼워진 꼴이 된 것이다. 
  
  동부 켄터키 애팔래치아 끝자락에 있는 에드몬슨 카운티에서 만난 한 남자는 『예년 같았으면 담배 농장에서 일을 했을 텐데 올해는 잔디 깎는 것 말고 별로 일감을 못 구했어요』 라고 말했다. 『그럼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하느냐』는 질문에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겠죠』라고 대답하며 싱긋 웃었다. 
  
  
  애팔래치아의 「가난」이라는 관광 상품 
  
  
  그밖에 애팔래치안들은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로도 유명하다. 빗물을 받아 샤워를 하고, 집 근처 공터에 농사를 지어 대충 자급자족을 하기 때문에 손은 농부의 그것처럼 굵고 두꺼우며, 돈이 없어 신발을 못 사므로 맨발로 다닌다는 이미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 「맨발의 사나이」인 것이다. 켄터키 사람들의 『나는 신발 신고 다닌다』는 농담반 진담반 소리도 그런 이유에서 나오는 말이다. 
  
  애팔래치안은 가난해도 애팔래치아는 사실 대단히 아름다운 산맥이다. 영화 배우 브래드 피트가 할리우드에서 돈을 벌자마자 큰 땅을 사들이기도 했던 미주리州의 오자크 마운틴(Ozak Mountain)이나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매머드 동굴이 있는 켄터키의 국립 공원 등지는 美 전역에서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곳이다. 그런데 관광객들이 애팔래치아 지역으로 관광을 가면서 내심 가장 보고 싶어하는 「관광 상품」 속에는 애팔래치안들도 속한다고 한다. 
  
  문화 우월주의(Cultural Imperialism)적 태도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지난 100년 동안 미국의 풍요와 발전에 역행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구경하고 싶은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작가들과 기자들에 의해 극대화된 애팔래치안들의 원시적인(?) 삶과 폭력성들을 「구경」하기 위해 차를 몰고, 문은 잠근 채, 그 지역을 드라이브하는 이들의 무례함은 종종 지식인들의 비판거리가 되곤 한다. 
  
  『하버드 대학의 명성은 케임브리지에서 멀리 떨어져 나갈수록 커진다』라는 말이 있듯이, 트레일러 코트나 애팔래치아의 빈곤도 「현장」에서 멀어져 갈수록 살이 붙어 더 열악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이겠다. 
  
  「애팔래치아로부터의 답변(Back Talk from Appalachia)」은 일반인이나 주류 문화학자들이 갖고 있는 애팔래치안들에 대한 선입견을 정면 공격하는 책이고, 『나는 애팔래치아 출신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그곳 출신 詩人과 소설가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최근에는 선입견을 버리고 그들을 봐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동조도 적잖은데, 그 틈에 나도 한번 그들의 생활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미국 언론들이 가끔씩 자문하듯이, 과연 미국에서 가난한 것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가난한 것일까? 
  
  
  「빛나는」 트레일러 코트 
  
  
  먼저, 트레일러 코트 이야기이다. 
  
  지난 7년 동안 주변에서 백인들로부터 줄기차게 트레일러 코트 사람들에 관한 농담들을 들은 바 있던 데에다 자동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날 때에 보게 되는 보기 흉한 주변 환경, 그리고 영화 속 이미지들 때문에 대충 그들의 가난함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손님으로 가장」하여 그런 집을 파는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갔었다. 
  
  이동 주택이기 때문에 부동산 사람들은 대개 넓은 垈地(대지)에 트레일러들을 쫙 모아놓고 그 가운데에 사무실을 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일흔이 넘은 할머니 드니즈는 정장 차림으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할머니는 『집 좀 구경하고 싶다』는 내 말에 열쇠 꾸러미를 내어 주며 돌아다니면서 집들을 전부 구경해 본 뒤 마음에 드는 것을 알려 달라고 했다. 
  
  가격대는 최근에 만들어진 새집이 9900 달러에서 1만2000달러라니 우리 돈으로 치면 1300원 환율일 때에 1300만원에서 1600만원 정도 하는 것들이었다. 그 말고 소위 「중고 트레일러」는 5000~6000달러만 주고도 살 수 있다고 했다. 
  
  트레일러 문을 열고 들어서기 직전까지 내가 상상하고 있던 내부 전경 때문에,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기가 약간씩 다르지만 작은 것은 실 평수가 30평쯤 되는데, 큰 방 두 칸에 욕조까지 달린 화장실 두 개가 있었으며, 그 중에 하나는 버블 배스(Bubble Bath)라고 해서 물 안마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넓은 거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납 공간이나 주방의 짜임새, 그리고 설치되어 있는 냉장고와 식기 세척기, 전자레인지 등을 볼라치면 「이게 어떻게 극빈자층 사람들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라 할 수 있겠는가」하는 반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 내부 시설이 되어 있는 집은 우리 나라에서라면 꽤 잘 꾸며진 집으로 여겨졌을 것이다(우리나라 집들의 내부 구조가 얼마나 쾡한지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잘 꾸며져 있는지는 몰랐다』고 말하자 드니즈는 대번에 일반인들은 트레일러 코트에 대해 너무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지난 30년 동안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나 책들 속에서 트레일러 코트가 매도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트레일러라고 하지 않고 매뉴팩처링 하우스(manufacturing house)라고 하죠』 하며 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표현을 고쳐 준 그녀는 트레일러를 가져다 놓을 땅은 구했는지 물었다(일단 트레일러를 사면 어디든 옮겨 놓아야 하기 때문에 땅값이 또 따로 든다). 그래서 땅이 없다고 하자, 그녀는 『그럼 고속도로 타고 올라가다 북쪽으로 부지가 있는데 그곳에 한 번 가 보겠느냐』고 물었다. 트레일러들이 모여 있는 코트를 이르는 말이었다. 
  
  트레일러 코트에 이르니 그 또한 뜻밖이었다. 조성된 지 10년 되었다는 그곳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잔디가 있었는데 드니즈의 말에 의하면 요즘에는 트레일러 코트에도 잔디를 조성하고 환경 정화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트레일러 코트가 변하는 것은 사실 미국 극빈자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마저 다소 부동산 투자 지역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옳다. 트레일러 소유주들이 몇 개씩 소유하여 세를 내 주는 것이다. 전체 트레일러 코트 거주자들 중에 50% 이상이 세입자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9000달러쯤이 싼 편이라고 말했지만,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그것도 트레일러라는 명목 하의 집 값으로는 극빈층이 마련하기 힘든 액수로 여긴다. 점차 비싸지는 트레일러 값을 극빈자는 감당할 길이 없고, 결국 그마저 한 달에 몇 백 달러씩 월세를 내는 임대 주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집주인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실직자들이나 마약 상용자들이 많은 트레일러 코트에서 얼마나 세를 제때 받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겠다. 
  
  어쨌거나,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새로 지어진 집들의 4분의 1이 매뉴팩처링 하우스이고, 1990년대에만 해도 제집 가진 사람들의 6.75%가 트레일러 코트 사람들이라고 하니 수효로만 치자면 그렇게 소수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트레일러 코트 사람=백인 쓰레기」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감내하면서 트레일러 코트에 산다는 것은 웬만큼 절박한 가난이 있지 않고는 선택할 사항이 못 되는 듯 싶었다. 
  
  
  애팔래치안들의 유별스런 愛國心 
  
  
  트레일러 코트를 구경한 다음날에는 지난 몇 달 동안 주변 사람들로부터 한 번 가보라는 이야기를 듣던 켄터키州 에드몬슨 카운티를 찾아갔었다. 켄터키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에 국립 공원을 조성하면서 일종의 「강제 이주」 형태로 내려와 정착한 애팔래치안들의 새 도시인데, 그 고전적 생활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었다. 
  
  『그곳에 가서 뭐라고 질문을 해야 할까요? 애팔래치안이라거나 「힐빌리」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을까요?』 하고 물었을 때, 에드몬슨市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인 데이비드 코버데일씨는 『그런 단어의 사용은 절대로 피하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또, 그들로부터 많은 대답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배타심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1960년대 이후 애팔래치아 지역 활성화 방안으로 꾸준히 진행되었다는 도로 공사 때문이었는지, 그곳으로 가는 2차선 도로는 매끈했고, 주변 경관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에드몬슨 카운티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브라운스빌에 도착하여 그곳 시청에 갔을 때에는 지역 주민의 특성이 「애국심과 가족 사랑」이라는 안내 팸플릿을 받을 수 있었다. 
  
  애국심이 유달리 강하다는 점은 애팔래치안들의 또 하나의 특징이 된다. 비록 경제 발달의 혜택이나 정치적 수혜를 가장 적게 받는 「소수 인종」이고 선거 철을 제외하고는 정치인들의 관심 대상도 못 되는 지역이지만, 미국에 대한 자긍심은 오히려 가장 강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초기 이민자들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변하는 세상의 물결과 섞이지 않은 채 고립적으로 보전되어 온 결과이겠다. 
  
  
  곰이 좋아서… 
  
  
  팸플릿을 받은 뒤에 코버데일씨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소개해 줬던, 낚시 가게에서 만나려 했던 사람은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그가 아침 일찍 도시로 의료 진찰을 받으러 나갔다고 말한 아들은 『이 마을에 관한 것은 길 건너에 있는 자동차 부품 수리점의 피트에게 가보세요. 아흔 두 살 된 노인인데 큰 소리로 말하기 전에는 잘 못 알아듣지만 이 마을에 관해서는 가장 잘 알고 있죠』 라고 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갔더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쇠망치를 들고 서서 『나보다는 마을 법정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존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그가 배운 것이 많으니 좀더 잘 알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마을 법정으로 가서 또 그 소개받은 사람을 찾았다. 
  
  『제 아버지이신데, 노인성 치매에 걸려서 지금 집에 계십니다』 
  
  존이라는 사람의 아들인 존 주니어의 말이 그랬다. 
  
  『피트씨가 소개를 해 주시던데…』 하자 존 주니어는 『아, 피트는 제가 초등학교 때 스쿨버스 운전해 주시던 분이었어요. 우리 아버지 치매 걸린 거 모르시던가요?』 하며 웃었다.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곰 구경 때문』이라는 그의 사무실에는 그 지역 산악에 가끔 나타난다는 곰의 사진, 그리고 조지 부시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만약 내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몇 시간이라도 곰 이야기를 하려 들었을 것처럼 즐겁게 흥분해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날 만난 사람들은 법정 직원들, 그 치매 걸린 할아버지의 아들, 마을 도서관 사서, 세무사, 담배 농장 인부, 꽃가게 점원, 담배 가게 점원 등으로 주루룩 이어졌는데, 그게 그 마을 주민들의 절반 수효였다. 
  
  이들 중 20대 초반의 담배 가게 남자 점원은 우리나라 문산 미군 부대에 1년 동안 군인으로 주둔한 적이 있던 사람이기도 했으며, 그 마을 주민들 중에 비행기를 타 본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마을로 돌아온 이유를 물었을 때 들은 대답은 『가족이 모두 이곳에 계시거든요』 였다. 
  
  또, 법정에서 만난 비교적 젊고 세련된 모습의 한 20代 여인은 『지난 10년 동안 이곳은 전혀 변한 게 없어요. 인구 수효도 안 변했다니까요』 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끼리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좀 귀찮죠』 라고 말하는 그녀는 할 것도, 즐길 것도 없는 지역 생활이 다소 따분하다고 투정하다 자신의 상사가 사무실로 들어오자 얼른 자세를 고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마을에서 가장 흔히 일어나는 범죄는 『가정 폭력』이라는 말이나, 그밖에 저간의 사정이 미리 읽어 두었던 애팔래치아 관련 책자들의 내용과 별반 다른 것이 없음은 내 취재력의 부족인지, 나도 그 「문화우월주의자」들처럼 백인들의 가난을 「눈으로 보겠다」는 기대에 너무 부풀었던 탓인지 맥 빠지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남부 멕시코 접경 지역에 있는 히스패닉系 미국인들의 가난을 보러 가는 것이 「보는 충족」을 시키기에는 더 나았을 것 같았다. 아마 그들이었다면 가난이 싫다, 잘 살아보고 싶다 따위의 어쩌면 나와 같은 도시쟁이들이 「원했던」 그 뻔한 답을 해 주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코버데일씨가 경고했듯이, 타지인인 내가 애팔래치아 언저리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었던 말들은 곰 구경에 관한 즐거운 에피소드나, 7~8代를 거쳐 한 집에 사는 이들의 창백한 미소뿐이었던 듯하다. 
  
  예전에도 변한 것이 없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 없으며, 비즈니스가 확장될 일은 더욱 없을 것이라는 그 마을 주민들의 이구동성과 함께 덧붙어 나오는 『그래도 이곳에서 살 것이다』는 말은 사실 매연 냄새도 좀 맡아야 하고, 뭐라도 좀더 나은 물질의 이기를 궁금해 하는 나 같은 사람이나, 애팔래치아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장사거리를 호시탐탐 찾고 있는 비즈니스맨들,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자꾸 넓혀 세상과 연결시켜 주겠다고 선거 철마다 관심보이는 정치인들에게나 사뭇 의아스러운 반응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가난이란 프랭크 맥콜트(Frank McCourt)의 퓰리처 수상작 「앤젤라의 재」(Angelar’s Ashes) 에서처럼 그런 삶을 가난으로 상정하고 글을 시작하는 작가의 섬세한 감수성에 의해서나 세상에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국가가 개인의 가난을 책임질 필요가 있을까? 
  
  
  1999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켄터키 동부 애팔래치아에 있는 잭슨 카운티를 방문한 일은 미국 역대 대통령들을 통틀어 몇 번 안 되는 극빈 지역 방문 행사였다. 그의 방문을 두고 레임 덕 기간에 치르는 공식 행사일 뿐이라거나,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한 순방이었다고 폄하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클린턴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4달러짜리 간이 의자에 앉아 소다를 마시며 『나도 비슷한 지역 출신』이라고 말한 이벤트는 언론을 통해 미국 전역에 「미국이 숨겨 놓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환기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의 방문이 애팔래치안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일까?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 이 백인들의 가난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던 사람은 시어도어 루스벨트(공화당, 제32代)와 린든 존슨(민주당, 제36代), 그리고 빌 클린턴(민주당, 제40代) 대통령 세 명뿐이었다. 
  
  특히 존슨 대통령은 1960년대에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을 선포하고 애팔래치안 산맥 근처에 사는 백인 사회의 경제 부흥을 대대적으로 장려했었으나,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애팔래치안들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심지어 인구 변화도 없이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가가 개인의 가난을 책임질 필요가 있을까? 30년 전과 지금이 똑같다는 이 애팔래치안들의 삶을 무엇으로 어떻게 바꿔 줄 것이며, 바꿔 준다면 그들이 좋아할까? 정치적 소외를 가장 많이 받는 소수 집단이라는 미국의 「극빈자층」을 극빈자층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할까? 도울 필요가 있을까? 
  
  최근에 카이저 패밀리 파운데이션과 하버드 대학 케네디 스쿨에서 공동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는 미국인들이 극빈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한 사례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먼저 미국인들은 연방 정부에서 설정한 가난의 경계선이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4인 가족 기준 올해 최저 연 수입 경계선이 1만7029달러인데, 이는 실제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턱없이 낮은 액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계선을 높여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어졌다. 
  
  
  가난에 대해 상반된 의견 
  
  
  최근 출간한 나의 책 「나는 미국이 딱 절반만 좋다」에서도 언급된 바 있거니와, 정치적으로 민주-공화파로 나뉜 미국인들은 미국의 가난에 대해서도 상반되는 의견을 보인다. 
  
  먼저 공화당파들은 개인의 가난함은 게으름때문이라고 여긴 반면에 민주당파 사람들은 환경적 요건 때문이라고 답했다. 또,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는 좋은 방안을 마련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질문에 공화당은 다수가 부정적으로, 민주당은 다수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밖에도 공화당파는 가난한 사람들은 정부의 복지 정책에 의존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 안일하게 생활한다는 점에 동의했고, 민주당파들은 정부의 복지 정책이 아직 부족하다는 점에 많은 동의를 했다. 
  
  이런 식으로 의견이 갈라지는 것은 결국 의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법안을 마련하는 데 난제가 되는 것이겠다. 공화당파가 대통령이 되면 극빈자 지원책이 감소하고, 민주당파가 대통령이 되면 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유권자들의 반반의 성향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 그것도 백인으로 태어나 겪는 빈곤 상태는 어쩌면 본인들보다 주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브라운스빌에서 만난 도서관 司書는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한때 대도시로 나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일을 했었는데, 역시 제겐 그런 큰 도시보다는 여기가 훨씬 편한 것 같아요. 돌아온 지 일년이 되어 가는데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스며드는 불법 이민자들의 「미국적 富」에 대한 갈망이나, 월 스트리트에서 상승 곡선을 그으며 연봉을 챙기는 봉급쟁이들의 술자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래의 불안감이나, 맨발로 집 앞 잔디를 뛰어다니는 애팔래치안들의 「무사태평」한 인생관은 내게 미국인들의 상대적 가난함이 과연 누굴 두고 하는 말인지 헷갈리는 의문만 잔뜩 던져 주고 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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