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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불편해도 참고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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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영 뉴욕 특파원

 

기자가 사는 미국 뉴욕 아파트의 1층 자판기에선 생수 한 통을 1.50달러에 판다. 어느 날 돈을 넣고 버튼을 눌렀더니 생수 6통이 와르르 나왔다. 관리인에게 "자판기가 이상한 것 같다"고 하자 "그냥 먹으라"고 했다. "자판기를 고쳐야 할 것 같은데…"라는 지적에 그는 귀찮다는 듯 "알았다"고 답했다.

 

두 달이 지나도록 아직도 자판기에선 '1.50달러에 생수 6통'이 나온다. 아파트 주민들은 아예 자판기에 갈 때 6통의 물을 편하게 가져오려고 장바구니나 비닐봉지를 들고 간다. 고치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너도나도 '부당이익'에 익숙해진 것이다.   

집 앞 건물 우체국엔 3일째 '신용카드 사용 불가'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다. 인터넷이 고장 나 전산이 마비됐다고 한다. 한국에 중요한 서류를 발송할 일이 있어 사흘 연속 우체국을 찾았다. "오늘도 국제 특송우편 발송은 불가능하다"는 직원에게 도대체 인터넷을 언제 고칠 것인지 따져 물었다. 직원은 태연하게 답했다. "다른 우체국에 가지 그래요." 

 

뉴욕 지하철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문구 중 하나는 '수상한 물건을 보면 즉각 신고하세요'다. 9·11 테러 이후 지하철 테러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뉴욕 경찰은 빈 가방이나 주인 없는 상자 등을 보면 바로 신고하라고 적극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뉴욕 지하철에서 수상한 물건을 '즉각' 신고할 방법은 없다. 지하철에선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뉴욕 지하철 468개 역 중 4개 역에 휴대전화 발신기를 설치했다고 뉴욕시가 발표했지만, 그 역들도 아직 휴대전화 통화가 잘 되지 않는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지난 9월 출간한 책 제목은 '저것이 바로 우리였는데: 미국은 우리가 발명한 세상에서 어떻게 뒤처졌고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이다. 그는 책에서 2년째 공사 중인 워싱턴DC 기차 역의 에스컬레이터를 예로 들면서 "출퇴근 시간마다 기차 역이 큰 혼잡에 빠지는데도 에스컬레이터는 고장 난 그대로 방치돼 있다. 가장 섬뜩한 사실은 사람들이 이미 먹통 에스컬레이터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한 달째 확산되고 있는 '월가(街)를 점령하라' 시위는 '탐욕에 휩싸인 상위 1%'를 타깃으로 삼는다. 극심한 양극화, 나날이 심각해지는 청년실업, 끝이 보이지 않는 두 개의 해외 전쟁, 급부상하는 중국 경제의 위협 등 미국 사회엔 '고장'을 알리는 빨간 불이 여러 개 켜진 상태다.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접한 요즘 미국은 망가진 것을 고치지 않고, 그저 불편함에 익숙해지라고 강요하는 사회로 보인다. 자판기와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난 정도라면 참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국가 부채나 청년 실업같이 뿌리 깊은 문제가 계속 방치된다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앞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미국 부자와 정치인의 대다수는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제 잇속을 챙기는 데 급급해 있다고 시위대는 비난한다. 미국의 '상위 1%'가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력을 시급한 수리가 필요한 사회 각 분야를 고치는 데 투여했다면 '분노한 99%'의 불길이 지금처럼 빠르게 번지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출처

 

https://www.google.ca/am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20/2011102001801.html%3foutputType=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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