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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캐나다인과 한국계 일본인이 본 '다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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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데이비드 스즈키와 오이와 게이보가 쓴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

민종원(2005)

등록|2009.07.30 14:55수정|2009.07.30 14:55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데이비드 스즈키, 오이와 게이보 지음)겉그림 일부. 나무와숲 펴냄, 2004. ⓒ 민종원

지금부터 시간을 죽 거슬러 가 10년 전, 20년 전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되돌아보라면 내 낯빛이 어찌 될까. 그것도 이전에는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곳을 이방인이 된 상태에서 다시 찾아온 것이라면. 혹은, 바로 옆에 두고도 그 깊은 관계를 전혀 알지 못하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비밀문서 발견하듯 접하게 된 것이라면.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멀다는 게 무엇인지를 대번에 알 수 있지 않을까.

캐나다 이민 3세대 데이비드 스즈키와 한국인 아버지를 둔 오이와 게이보. '니케이'(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일본인) 환경운동가와 '자이니치'(재일. '재일한인'같은 말에 쓸 수 있다) 인류학자. 이 둘은 2년여 시간 동안 일본 남쪽 끝 오키나와부터 북쪽 끝 홋카이도까지 자기 자신을 발견하듯 사람을 찾아다녔다.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이와 역시 일본인이면서 어느 날 갑자기 한국 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가 만나 찾아다닌 일본은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일본'이었다.

 

처음 본 일본, 다시 본 일본, 그리고 그 속에서 본 '다른 일본'

일부러 고통을 끌어안을 이유는 없을 테지만 고통이 그저 고통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도리어 그 때문에 적어도 나와 같은 고통을 지닌 이들을 솔직담백하게 대할 수 있으리라는 조심스런 소망은 품어볼 수 있으리라 여긴다.

데이비드 스즈키와 오이와 게이보는 둘 다 어떤 면에서는 일본인이면서 동시에 '이방인'이다. 이들은 그런 점을 상처로 여기며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그런 배경을 일본 속으로 들어가는, 결국 자기 자신들 속으로 들어가는 이음줄로 삼았다. 각자 조금씩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일본을 다시 보고 자신을 다시 봐야 할 이유가 있었던 두 사람은 일본도 다시 보고, 자기 자신들도 다시 보고, 무엇보다 온 세상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나무와숲 펴냄, 2004)는 일본을 들여다보는 책이면서도 이상하게 책 읽는 사람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다. 일본 열도 끝에서 끝까지 길고 긴 길을 다닌 덕에 민족, 자연, 역사 등 갖가지 이야기를 담게 되었지만 결국 그 모든 게 한 곳에 모여드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게 된 두 사람. 그들이 다닌 곳은 일본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동안 일본이 보지 못했거나 보지 않으려 했던 곳들이었다. 지은이 두 사람은 일본 속 '다른 일본', 역사 속 '다른 역사', 사람 속 '다른 사람'을 보았다.

"아사이는 또 자기 어린 시절의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에서 부라쿠민 아이들은 일본인 아이들이 자기 도시락통을 들여다보며 부라쿠민 음식이라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너무 싫어 반찬을 숨긴 채 먹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사이는 한국인 아이들도 반찬을 숨겨 가며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부터 아사이는 한국 아이들에게 가서 반찬을 바꿔 먹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기 시작했다. 오타는 부라쿠민과 한국인들은 모두 차별을 받았으며 흔히 같은 차별 구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색다른 음식과 문화적 특성을 공유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 206)

한국인이어도 한국을 들여다보려 애쓰지 않으면 한국을 모를 수 있다. 한국을 들여다본다 해도 멀찍이 서서 또는 높이 서서 대충 가늠하는 것으로는 사람 목소리 각기 다른 것을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돈 없어서 '없는' 사람 마음 아는 것, '이방인'이어서 이방인 마음을 아는 것이 얼마나 나를 다시 보게 하는지를 안다면 고통과 행복의 기준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새삼 다시 보건대, 데이비드 스즈키와 오이와 게이보가 본 것은 죄다 일본이었지만 그들 마음에 새겨진 것은 죄다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일본'이었다. 그건 가능한 한 가까이서 일본을 보고 일본 속 일본을 보려 노력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들이 일본인 아닌 일본인이라는, 외면하거나 지울 수 없는 아픈 배경 덕분(!)이었다.

전체에서 '어긋나는' 것에 대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집단 징계하는 행위, 이지메. 그저 바라보는 이에게도 '어긋남'이 뜻하는 것과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행위, 이지메. 이지메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일본' 냄새를 풍기는 그 어떤 행동도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겠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전체' 일본과는 '어긋나는' 이들일 수밖에 없는 이 두 사람이 본 것은 그래서 '전체' 일본이 아닌 '다른 일본'이었다.

"절대 다수의 일본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묻는 경우가 좀처럼 없고, 그것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자기 과거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제한되어 있다. 억압받는 소수 그룹인 아이누, 오키나와인, 부라쿠민, 그리고 한국인은 인간성의 위기가 동물·식물·바다·강·산이 맞은 위기와 교차하는 지점에 서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렇게 중대한 지점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환경 인식은 점점 깊어져 가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점점 밝아져 가는 것이다."(같은 책, '에필로그', 432)

'다른 일본'도 '다른 사람'도 여기 '우리'와 함께 산다

일본인, 캐나다인, 한국인, 환경학자, 인류학자, 그리고 '다른 일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게 바로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이다. 민족 문제만 다룬 것도 아니고 자연 문제만 다룬 것도 아니고 역사 문제만 다룬 것도 아니다. 사실 어느 한 가지 주제에 집중했다기보다 일본이라는 눈에 보이는 테두리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죄다 들여다보고 말 걸어 살려내려 했다. 우리가 이 색다른 일본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고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이다.

일본에는 당연히 일본인이 산다. 그런데 거긴 '다른 사람'도 산다. 일본 북쪽 끝인 홋카이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아이누인과 일본 남쪽 끝인 오키나와에서 볼 수 있는 오키나와인, 그리고 오래 전에 굳어진 보이지 않는 관습 때문에 같은 일본이면서도 '더러운' 존재로 무시당해온 부라쿠민(=부락민)이 그들이다. 물론 이들과 조금 다른 조건에 있는 재일한국인도 있다. 일본에는 일본인도 있지만 그 외 '다른 사람'도 많다.

책은 사람도 많이 다루지만 자연도 많이 다룬다. 오랜 기간 그리고 지금도 미군 기지로 고통받는 오키나와를 비롯해서 책은 사람과 기술과 개발경제성장 중심 생활방식에 신음하는 일본 자연 세계에 적잖은 관심을 쏟았다. 이게 다 '다른 일본'을 보는 과정이 낳은 자연스런 결과이며 지은이들이 바라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숨은 사람들을 일부러 찾다 보니 숨은 사회들이 보이고 숨은 사회들을 보다 보니 그들이 발 디디고 사는 세상 곧 자연이 보였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지은이들이 일본에서 이렇듯 참 많은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다 연결되어 있더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지금 두 사람 아버지들은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책은 출간되었고 이후 10년도 훨씬 넘는 세월이 흘렀다. 각자 다시 일본계 캐나다인과 한국계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게다. 그리고 여전히 일본 속 일본을 들여다보며 새삼 자기 자신을 곱씹어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따뜻한 미래를 꿈꾸는 이들의 낮은 목소리'를 들려주려 했다 말하고 싶을 이들 두 사람. 지금 이들이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
 

덧붙이는 글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 데이비드 스즈키·오이와 게이보 지음 이한중 옮김 나무와숲 펴냄. 2004. 
(원서)The Japan We never Knew by David Suzuki and Keibo Oiwa(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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