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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잘하네” 아시안 칭찬 뒤엔 미국사회 ‘영원한 이방인’ 낙인

Winnipeg101 LV 10 21-12-11 271

등록 2021-05-21 05:00 
수정 2021-05-21 11:54

 

[미국 아시안의 딜레마]
급증한 아시안 대상 증오범죄
코로나·미중 갈등이 불댕겼지만
그 이면엔 뿌리깊은 인종주의

“흑인이 미국사회 안 타자라면
아시안은 사회에 끼지도 못해”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한인타운에서 지난 3월27일(현지시각) 열린 반아시안 인종차별과 증오범죄 근절을 촉구하는 ‘전국 행동의 날’에 참가한 시위대가 ‘아시안에 대한 증오를 멈추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이철호 통신원

 

1966년 미국 사회학자 윌리엄 피터슨은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일본계 이민자의 성공을 흑인과 비교하며 ‘모범적 소수계’(Model Minority)라는 말을 썼다. 언뜻 ‘칭찬’으로 보이는 이 개념은,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을 성공한 이민자로 정형화하는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반세기 넘게 미국 사회에서 모범적 소수계로 불린 것이 무색하게도,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로 규정한 직후 아시안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급증했다. 비영리단체인 ‘아시아·태평양계(AAPI) 혐오를 멈춰라’는 2020년 3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아시아인에 대한 언어폭력은 68%가 늘었고, 신체폭행도 11%가 늘었다고 보고했다. 지난달 말 미 상원에 이어 18일(현지시각) 하원도 아시안에 대한 증오범죄 방지법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킬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


미국과 아프리카 국가가 반목한다고 미국 내 아프리카계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미-중 갈등은 순식간에 미국 내 아시아인 전체에 대한 혐오로 전이됐다. 20일 오전 존스홉킨스대 통계 기준 확진자 3302만여명, 사망자 58만7천여명에 이를 정도로 최악이었던 미국의 코로나19 상황과 그에 대한 공포와 분노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와 아시안의 취약한 입지가 재조명되고 있다. 박정선 캘리포니아주립대(도밍게즈 힐스) 아시아학과 교수는 최근 <한겨레>와 한 전화 및 이메일 인터뷰에서 “아시아인은 미국 사회에서 철저히 타자화되어 있고, 이것이 아시안 차별이 흑인 차별과 다른 점”이라며 “흑인은 미국 사회 안의 타자인 반면, 아시아인은 미국 사회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타자”라고 분석했다.

모범적 소수계’ 신화, 인종차별 왜곡할 뿐

 

<한겨레>가 지난 10일 전화로 인터뷰한 윤은영(54)씨 가족은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의 이미지로 통용되는 ‘모범적 소수계’의 전형처럼 보인다. 부부는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남편은 1970년대 이후 ‘아메리칸드림’의 현장이었으나 이제는 쇠락하고 있는 지역 소매시장 ‘스와프 미트’에서 주로 라틴계를 상대로 의류를 판매한다. 윤씨는 ‘한인타운 노동연대’라는 비영리단체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한다. 첫째 데버라 최(27), 둘째 데이비드 최(25), 셋째 다이애나 최(20)는 모두 서부 명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 들어갔다. 로스쿨을 졸업한 큰딸은 텍사스주 오스틴의 비영리단체에서 무슬림을 법률적으로 돕고 있고, 아들은 “로스앤젤레스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시청 공무원이 됐다. 아직 정치학을 공부 중인 막내는 인종차별과 페미니즘, 자본주의 문제에 관심이 많고 졸업 뒤 “무슨 일을 할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윤씨 가족처럼 미국 사회에서 모범적이라는 ‘칭찬’을 받는 삶을 산다고, 아시안이 미국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민권자인 다이애나는 중·고교 시절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결합된 이중 차별 속에서 “늘 열받고 너무 화난” 사춘기를 보냈다.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외모 희롱을 많이 받았지만 아시안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차별은 “영어 진짜 잘한다!”는 말이었다. 미국인인데 이방인으로 타자화하는, 칭찬을 가장한 모욕인 셈이다. 어린 마음에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나는 왜 미국인이 아닌가 싶었고, 백인처럼 행동하고 싶어” 스스로 한국어를 내려놓았다. 윤씨는 “딸이 그런 마음으로 영어만 쓴 것을 뒤늦게 알고 마음이 미어졌다”고 말했다.

 

불평등 불만 억누르고 소수계끼리 갈등 부추겨

 

모범적 소수계라는 말에는 백인 중심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고 노력해 성공한 2인자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성공하지 못한 소수자가 불평등을 말할 때, 주류 사회는 성공한 소수계를 언급하며 ‘너희도 노력하라’고 억압하고, 이 때문에 소수계끼리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옌 장 등은 <아시안 아메리칸에 대한 증오범죄>(2021)에서 1992~2014년 데이터를 분석했는데, 아시안 증오범죄의 경우 흑인·라틴계에 대한 증오범죄와는 달리 가해자가 백인이 아닌 소수계인 경우가 많았다.

 

옌 장 등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경제, 교육 및 기타 기회에서 성공했다고 가정하는 ‘모범적 소수자’ 고정관념은 다른 인종 구성원들에게 잠재적인 경쟁이나 위협을 야기한다”고 원인을 분석했다. 역으로 모범적 소수계 신화를 내재화한 소수자일수록 자신을 백인과 동일시하고 다른 소수계를 ‘인종차별’하는 모순적 상황이 빚어지기도 한다. 한인타운 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윤은영씨는 “임금 착취를 당해 상담을 온 한인 노동자가 다른 소수계 노동자를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경우도 많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백인 주류 사회는 미국 사회의 구조적 책임을 소수계끼리의 이런 갈등에 전가하려 한다. 대표적으로 1992년 ‘사이구’(4·29, 로스앤젤레스 폭동)가 있다. 당시 흑인을 구타한 백인 경찰들이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을 기화로 폭동이 일어났고, 경찰과 주방위군이 백인 거주지 위주로 배치돼 무방비 상태였던 한인타운이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미 언론은 성공한 한인이 흑인을 냉대해 약탈의 대상이 됐다는 메시지를 쏟아냈다.

 

최근 미국 사회에서는 모범적인 아시안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다시 아시안과 흑인 간 갈등을 악화시킬 조짐도 보인다. 한국계 작가 제이 캐스피언 강은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쓴 ‘우리는 이 폭력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칼럼에서 샌프란시스코 최우수 공립 고교인 로웰의 사례를 들었다. 이 지역 교육위원회는 최근 로웰에서 학점에 기반한 입학사정을 중단할 것을 의결했다. 특정 인종에 치우치지 않는 형평성과 다양성 강화가 명분이지만, 결과적으로 성적이 우수한 아시안이 피해를 입게 되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왜 우리(아시안)는 길거리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들(흑인)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우리의 명문 학교 자리를 내줘야 하는가? 더 평등한 미국을 추구하는 것이 제로섬 게임이어야 하는가?’

 

출신지역간 차이·‘대나무 천장’ 가릴 위험도

 

미 인구조사국이 지난해 6월 발표한 ‘2019년 센서스’를 보면, 미국 인구 3억2823명 중 백인이 60.1%, 히스패닉 18.5%, 흑인 13.4%, 아시안이 5.9%를 차지한다. 미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자료를 보면, 아시아인 가구의 중위소득은 9만3759달러로, 7만1664달러인 백인보다 높고(일하는 세대원이 많기 때문), 흑인이나 라틴계에 비해서는 거의 두배나 많다. 아시아인 중 대학 졸업 이상 비율은 56%에 이르는데, 흑인(23%), 라틴계(18%)보다 높은 것은 물론 백인(37%)보다도 높다.

 

하지만 모범적인 아시안을 뒷받침하는 이런 피상적인 숫자는 어느 인종보다 다양한 인구 구성과 아시안 내부의 심한 불균형을 반영하지 못하는 ‘평균의 함정’이자 ‘신화’에 가깝다. 미 인구조사국에서 분류하는 아시안은 한국인·중국인·일본인 등 동아시아계, 인도·파키스탄 등 남아시아계, 필리핀·베트남·타이 등 동남아시아계를 모두 포괄한다. 출신 지역에 따라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소득과 교육 수준 등 사회경제적 현상도 천양지차다. 또 2018년 퓨리서치센터 보고서를 보면, 미국 전체로 볼 때 1970년 상위 10%의 소득은 하위 10%의 6.9배였으나, 2016년 8.7배로 심화됐다. 이에 비해 아시안의 상·하위 10% 소득 격차는 같은 기간 6.1배에서 10.7배로 더욱 악화됐다. 아시아계는 출신 국가에 따라 교육 편차도 크다. 동아시아계의 대학 졸업자는 50%를 넘는 반면, 동남아시아계는 15%도 되지 않는다.

 

더욱이 모범적 소수계라는 인식은 최상류층 대부분이 백인인 사회에서 ‘대나무 천장’(아시아 국적이나 아시아계 미국인의 고위직 상승을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갇힌 아시안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가령 미 의회조사국 통계를 보면, 제117대 연방의회 의원(상원 100명, 하원 435명) 가운데, 아시안은 21명(3.9%)이다. 상원의원은 인도계 어머니를 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아시안으로 셈해도 3명뿐이다. 연방 하원의원 435명 중에서도 아시안은 한국계 4명을 포함해 19명에 그친다. 연방 상·하원 의원 수는 흑인(11%)이나 히스패닉(10%)보다 적을 뿐 아니라 인구 비율(6%)을 고려해도 과도하게 적다.

 

‘스톱 헤이트’ 확산…큰 변화 멀었지만 공통 자각 일깨워

 

지난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무릎에 8분46초간 목이 짓눌려 숨진 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불붙었다. 미국 사회는 비무장 흑인을 향한 공권력의 ‘살기’에 충격받았고,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 이후 가장 큰 ‘대오각성’을 이끌어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코로나19 확산 이후 아시안에 대한 증오범죄 영상이 잇따라 공개되고, 아시아 마사지 업소 연쇄 총격살해 사건까지 더해지면서 미국 사회가 술렁였다. ‘아시안에 대한 증오를 멈춰라’(Stop Asian Hate) 운동이 확산됐고, 상·하원을 모두 통과한 아시안에 대한 증오범죄 방지법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발효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아시안 커뮤니티에서도 이 운동과 법안의 한계를 지적한다. 데버라 최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와 달리 ‘아시안 혐오를 멈춰라’ 운동은 지향점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봤다. 그는 “애틀랜타 총격 사건을 보면, 아시아 여성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며 “경찰력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장성관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사무차장은 <한겨레>에 “모범적 소수계 신화, 즉 모범 시민이라는 오해 때문에 아시안 아메리칸은 전문직 종사자로 높은 수준의 소득을 누리고, 근면하고, 불평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잘 따른다는 인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렇기 때문에 제도적으로도, 직장 등 조직에서도, 또 일상에서도 ‘아시안 아메리칸은 공격당해도 보복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고, 최근 급증한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의 이유에도 이런 생각이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근본적인 인식의 문제를 증오범죄 처벌 강화 같은 표피적인 해결책만으로 해소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증한 아시안 증오범죄로 인해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 차별이 전례 없는 주목을 받고 있다. 흑인 민권운동 같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대한 전망은 아직 요원하지만, 적어도 이제껏 ‘콩가루’처럼 흩어져 있던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공통된 자각을 일깨운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제이 캐스피언 강은 칼럼에서 아시안들이 헤쳐 모인 위챗이나 카카오톡 같은 메시지앱에서 “‘우리 사람들이 거리에서 공격받고 죽는데 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가?’” 같은 핵심 질문이 공유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대만계인 존 양 아시안아메리칸정의진흥협회(AAJC) 회장은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는 방대한 다양성이 있지만, 권력·미디어·정부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공통의 싸움을 하고 있고, 영원한 국외자라는 도전 또한 공유하고 있다”며 “진정으로 정치적 힘으로 받아들여지려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선 교수는 “특히 아시아계 2·3세대는 1세대에 비해 언어·문화적 차이가 적은 편이고, 사회정의와 공평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인종과의 연대감이 높은 것은 긍정적”이라고 기대했다.

 

로스앤젤레스/이철호 통신원,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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