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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으로 순식간에 바뀐 재미 일본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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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7 18:41 송고

(서울=뉴스1) 배상은 기자

 

 

1941년 12월7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습 당시. © AFP=뉴스1

올해로 75주년을 맞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미국 내 일본계 이민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진주만 공습으로 순식간에 미국에서 '공공의 적'이 된 재미 일본인들은 전쟁이 계속될수록 '첩자' 취급을 받았고, 결국 미국은 서부 해안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계 12만명을 격리 캠프에 강제수용했다. 12만명 가운데 3분의 2는 미국에서 태어난 순수 미국 국적자였다. 

26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은 "아베 신조 총리의 하와이 진주만 방문을 맞아 2차 대전 동안 미국에서 일본계 이민자들이 받은 처우와 고난이 오늘날 정치 지형과 맞물려 다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면서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계 미국인들의 삶에 주목했다.

 

일본은 제2차 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1년 12월7일 하와이주 오하우섬 진주만에 주둔 중이던 미 태평양함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USS 애리조나호 등 12척이 침몰하고 항공기 164기가 파괴돼 민간인 49명을 포함 약 2400명이 사망했고, 이는 미국이 2차 대전 참전을 결정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서 부수적인 피해자들이 발생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이민자들, 즉 재미 일본인들이다. 

존 드윗 당시 미 서부 사령관(중장)이 1942년 서부 일본인들의 강제 이주 조치와 관련한 최종 보고서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2, 3세대 일본계 미국인들은 '미국화(Americanized)'됐지만 그들의 인종 습성은 희석되지 않았다"며 "일본인들은 인종 자체가 적(The Japanese race is an enemy race)"이라고 주장한 것은 당시 미국인들의 시각을 보여준다.  

결국 캘리포니아주는 곧 일본 이중국적자들에 대한 구금에 들어갔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 9066호를 단행해 12만명에 이르는 재미 일본인들을 서부 해안가에서 격리 캠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인 격리캠프는 미국 전역에 약 10곳이 있었으며 재미 일본인들은 오로지 일본계라는 이유만으로 근 3년을 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보내야했다. 

캘리포니아 만자나르(Manzanar)에 세워졌던 일본인 강제 수용소에 수용된 일본인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 © AFP=뉴스1

재미 일본인들에 대한 미국의 강제 수용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이들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올해로 93세를 맞은 퇴역군인 로손 이치로 사카이는 18세였던 1941년 당시 동급생이었던 3명의 백인 친구들과 함께 미 해군에 입대하려했으나 일본계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사연을 공개했다. 

사카이는 "내가 '왜 안돼냐, 나는 미국인이다'고 하자 그들은 당신은 잠재적 적군(enemy alien)이라고 말했다"며 "나는 더 이상 미국 시민이 아니었다. 내 조국에서 존재를 거부당하는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카이는 이후 병사 모집이 절실했던 미군이 일본계에까지 문호를 열은 1943년 3월에서야 입대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에 입대한 일본계 미군인은 3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대부분 제442 연대 전투단(Regimental Combat Team)에 소속돼 가장 치열한 전장으로 보내졌다. 

사카이는 "어느 누구도 죽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우리는 오로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했었다"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충정스런 미국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전쟁 말엽까지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싸운 제442단이 1946년 7월 미국에 귀국하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이들을 맞으며 "당신들은 적 뿐만 아니라 편견과도 맞서 싸웠고 승리를 거뒀다"고 치하했다. 

1942년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에 붙어있는 일본인 강제 구금 안내문. © News1


재미 일본인들은 이후 '도쿄 재판'이라 불리는 극동국제군사재판때도 통역가로 활약하면서 또 한번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했다. 

데이비드 아키라 이타미는 격리 캠프에서 1년을 보낸 뒤 곧바로 미군에 자원, 정보 당국 소속으로 일본군의 암호들을 해독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재미 일본인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보상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시민자유법에 서명한 1988년에야 이뤄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인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해 "인종적 선입견과 전쟁 히스테리,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에 따른 정책"이라고 비난하면서 강제수용된 일본계 후손 10만명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했다. 

일본과 미국의 아픈 상처 가운데 하나인 일본인 강제이주는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대변인이었던 칼 힉비가 테러단체들의 근거지가 있는 중동 일부 국가 이민자들의 입국을 제한하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의 선례로 언급하면서 일본계들의 반발을 불렀다. 

아기였을 때 격리캠프에 수용됐던 마이클 혼다(73 캘리포니아) 연방 상원의원은 이 발언에 대해 "충격 그 이상"이라며 "강제 이주는 정책이 아니라 혐오(hate)그 자체였다"고 비판했다. 

혼다 의원은 이날 BBC와 인터뷰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이 사실을 명확히 해주길 바란다"며 "그때까지 트럼프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겠지만 내각 인선을 보면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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