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생생 미국 리포트/ 1868년, 일본의 미국 이민 첫발

Winnipeg101 LV 10 21-12-24 175
미국에 이민한 일본 최초의 노동자들.

이훈구 작가

승인 2021.04.15 14:04


 

[일본의 미국 이민사(상)]

<미국 LA=이훈구 재팬올 미국대표> 일본인들의 ‘미국 이민’은 한국인들과 닮은 듯 다르다. 한때는 역사의 비극으로 한국인들 역시 같은 여권과 국적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150년이 넘는 이민 역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한 박해 시기를 제외하고는 그들은 비교적 미국에 잘 정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인들에 대한 ‘포비아’나 한국인들처럼 정착과정에서 다른 인종과의 불화 가운데 일어난 잡음도 없이 그들은 비교적 조용히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이민 역사에서 성공 신화를 썼고 미국인들에게 매우 호의적 반응까지 이끌어냈다. 그 이면에는 섬나라 사람이라는 기질(개방적이고 대륙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성향)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뿐만 아니라 브라질, 페루에도 비슷한 시기에 ‘계약이민’이 이뤄졌다.

 

물론 ‘성공 신화’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페루에서는 비록 나중에는 실패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이민 일본인 2세 알베르토 후지모리(Alberto Kenya Fujimori)대통령을 배출해 내기까지 했고 남미쪽 일본인 사회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후지모리는 1990년 ‘노동, 정직, 기술’을 내세우며 페루 유권자들에게 “당신과 같은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라는 호소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러한 성공 신화는 철저한 ‘현지화’의 결과물이었다. 필자는 총 3회에 걸쳐서 일본인의 미국(캐나다 및 중남미) 이민사를 다뤄보면서 그중 ‘일본계 미국인’(Japanese American)의 역사를 다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한인 디아스포라’와 ‘일본인 디아스포라’ 더 나아가 ‘중국인 디아스포라’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비교해 볼 것이다.

초창기 일본인들의 이민을 주도한  네덜란드계 미국인 반 리드(왼쪽.)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 최초
일본 최초의 해외 이민은 1868년(메이지 원년) 에도 막부의 허가를 받아 네덜란드계 미국인 반 리드(Eugene Miller Van Reed, 1859년 가나가와(神奈川)에 있었던 미국총영사관의 서기로 일본에 파견된 바 있고, 1866년에는 하와이 왕국의 총영사 자격으로 일본에 거주)에 의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계약이민 153명이었다. 1903년 86명의 조선인 이민자들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상륙했으니 그 역사는 한국인에 비해 길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단순히 하와이 이주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해 역시 반 리드의 주선으로 괌(Guam)으로 42명이 계약이민을 떠난 것이다. 이듬해인 1869년에는 독일인 슈넬(Shnell)의 알선으로 아이즈(會津), 와카마쓰(若松) 번(藩) 출신 40명이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입국해 와카마쓰 콜로니(若松コロニー)를 건설하게 된다.

 

메이지유신이 일어났지만 아직 일본이 안정된 상태도 아니었고 각 번 사이의 갈등도 남아있었던 혼란기였기 때문에 이민은 호응이 좋았고 따라서 번 단위와 정부 차원에서 허가를 내줬다. 드라마 ‘료마전’(NHK 龍馬伝, 2010) 등을 보면 번에서 번으로 넘어가거나 에도(東京)로 넘어가는 것도 허가가 안 되던 시절이니 외국으로의 이민은 기회였을 것이다. 또 1883년에는 영국인 존 밀러(John. A. Miller)의 알선으로 36명의 인부가 진주 채취를 위해 호주의 ‘Thursday Island’(일본명 木曜島)로 출국하게 되는데 역시 일본 정부가 허가한 이민이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산업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특히 농가에 중세가 부과되어 농민들이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직업도 없이 떠도는 젊은이들과 특히 부모가 없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에게 외국으로의 이민은 돌파구로 다가왔으며 훗날 일본계 이민으로 이어지는 후세대와 구별하여 ‘일세(一世, 잇세, Issei)’라고 불리게 된다.

 

오늘날 ‘일세’는 통칭하여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간 일본인 이민의 첫 번째 세대를 말하고 있다. 1861년부터 1940년 사이에 약 27만 5천명의 일본인이 주로 하와이와 미국 본토, 소수의 중남미 등으로 이주했는데 그들을 일세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캐나다로 이주한 인원들도 상당수였지만 캐나다의 반 일본인 이민 분위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가까운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곧 제한되었으나 대부분 ‘초청 이민’ 형식의 이주를 하는 합법화된 형태를 취했다. 

일본인들의 캘리포니아 정착을 보여주는 와카마쓰 콜로니 기념관.

 

▲계약이민서 집단이민으로
‘계약’으로 인한 단발적으로 이뤄졌던 이민은 1885년 이후 하와이로의 본격적인 집단이민이 개시되면서 대체로 다음의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에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전전(戰前), 전후(戰後) 일본인들의 해외이민(1885‐1972년)을 ‘3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제1기는 계약이민 시대(1885~1898), 제2기는 자유-계약 이민 시대(초청 이민 포함, 1899~1945), 제3기는 자유이민시대(초청 이민 포함, 1946‐1972년)로 구분하는 그것이다. 이 이민들 중 ‘제1기’가 후일의 ‘일본계아메리카인’ 성립의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구분은 일본인들에 의한 이주국으로의 ‘출국형태’를 근거로 한 것이다.

 

1898년까지의 일본이민은 하와이 등 대부분 지역이 계약이민으로만 출국한 시대였다. 1899년 이후 하와이로의 계약이민이 금지되고 자유이민 시대가 되나 여전히 브라질, 페루 등 계약이민이 행해지는 지역도 있어 1945년까지를 제2기 자유-계약 이민시대로 본다. 그러나 초청 이민(sponsored emigrant)이란 일반적으로 이민대상국에서 친족에 의해 초청된 이민을 지칭하나 미국의 경우에는 1907년의 이른바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 일본인 사업가와 전문직 종사자들에 대한 이민 제한을 위한 일본과 미국간 정부협정)’으로부터 1924년 ‘일본인 이민 배척법(排日新移民法)’까지의 16년을 특히 ‘초청 이민 시대’로 부르고 있다.

 

캐나다 역시 1907년 미국과 일본 간 신사협정 체결 이후 일본인 이민이 제한되어 초청 이민 시대로 부르고 있으며 때문에 미국과 캐나다를 하나의 맥락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신사협정 체결은 일본 정부의 ‘일본인 차별’에 대한 지속적인 항의에 따른 미국의 반응이기도 했다.

 

사실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체결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지위로 인종평등조약을 훗날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창설 시 명문화할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를 미국이 주도하여 ‘만장일치(17개국 중 11개국 찬성)’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했는데 그 이면에는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이 있었고 따라서 일본인 이민자들의 차별철폐를 위한 지속적이고 집요한 항의를 ‘일본정부’ 차원에서 이어갔던 것이다.

하와이 농장의 일본 이민자들.

 

▲차별, 외국인토지법, 남부 백인들
꿈과 희망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 갔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외로운 독신 노무자 생활과 열악한 노동 조건들이었다. 그들은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 미국 본토의 통조림 공장, 목재 제재소, 철도 건설, 농장 같은 곳에서 주로 일했다. 그러나 미국 서해안 지역들은 개인적으로 이민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유학생들과 전문직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단순히 ‘미대륙횡단철도’ 부설을 위해 투입된 중국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민이었다. 또한 농업에 종사하고 농장을 일구기도 해서 일부는 토지를 매입하는 소작농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 미국의 ‘토지노동조합’은 이러한 일본인 이민자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아시아인이 토지를 구입하거나 대여할 수 없도록 ‘외국인토지법’을 제정하도록 의회에 압력을 넣는다.

 

마침내 1913년 캘리포니아의회는 아시아인의 토지 구매와 3년 이상의 토지 임차를 금지한 법령을 제정하였다. ‘외국인토지법’은 19세기 말 미국 사회에 널리 퍼진 ‘황색 위험(Yellow Peril)’, 즉 황인종이 몰려와서 백인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는 인종주의적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1898년 하와이가 미국 영토로 편입된 이래 하와이에 거주하던 1만 2000명이 넘는 일본계 이민자들이 일시에 미국의 서부 지역으로 건너와 농업에 종사하게 된 것도 직접적 원인이었다.그러나 당시 미국 전역이 수많은 이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아시아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 가톨릭계 유럽인들의 이민이 대대적으로 이뤄졌고 이는 미국 남부지역의 백인들로부터 엄청난 반감을 얻고 있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자료에 의하면 1901년부터 1915년까지 무려 1500만명의 이민자들이 이민을 왔으며 여기에는 아일랜드의 대기근과 러시아혁명, 1차 세계대전 패전 같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중 동서를 막론하고 이민자 출신 국가들중 국가 차원에서 미국 정부와 ‘신사협정’을 체결한 것은 일본이 유일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이 비교적 다른 동양인 커뮤니티 더 나아가 다른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에 비해 ‘차별’을 덜 받게 된 배경이 되었다.

태그 :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84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