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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미국 리포트/ ‘완전 미국화’된 일본 이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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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미국인을 상징하는 여권

 

이훈구 작가

승인 2021.05.20 15:37

 

 

[일본의 미국 이민사(하)]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은 이민 사회에서도 감정이 좋은 편은 아니다. 미국까지 이민해서 함께 ‘아시안 커뮤니티’로서 연대를 한다면 좋겠으나 첫 단추부터 한국과 일본인은 ‘잘못된 만남’을 해야 했다. 하와이의 설탕 수출이 전성기일 때 미국 정부는 부족한 노동력을 처음 일본인, 포르투갈인, 필리핀인, 중국인으로 채웠다. 그들 중 중국인들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미국 본토로 건너갔고 따라서 노동력의 부족을 불러 왔다.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 이사회는 수시로 인력 부족에 직면했는데 또 다른 고민거리는 일본인들의 ‘동맹파업’이었다. 

 

당시 1882년 미국 본토에서 제정된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에 의거 하여 일본인 노동자들을 데려왔는데 이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파업을 자주 하게 된다. 이 때문에 최초의 의료 선교사이면서 미국공사를 겸하고 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을 통해 조선인 이민도 이뤄졌는데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걸으면서 일본에 대한 감정이 결코 좋을 리 없었다. 

 

당연히 1909년과 1920년 일본인 노동자들의 동맹파업 당시 조선인들은 파업 분쇄자(strike breaker)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조선인들은 파격적 대우를 받았지만 이때부터 미국 정부가 ‘일본인 커뮤니티’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근거가 되었다. 

잇세이(一世)와 닛세이(二世) 가정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Executive Order 9066)
제2차 세계대전의 10년 전부터 미국 정부 내 각 기관은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을 근거로 일본계 미국인 사회 조사를 면밀하게 실시했다. 처음에는 양국 간에 전쟁이 시작하더라도 일본계 사회는 미국에 위협을 주는 것은 없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였으나 중일전쟁 후 점차 시각이 바뀌었다. 

 

따라서 개전 된 경우 체포할 ‘후보군’들을 분석하고 관리목록도 작성되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일본인들은 ‘쇼와천황(昭和天皇)의 비밀부대’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고 언젠가는 미국 사회에 위협이 될 거라는 예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목록은 진주만 공격 몇 시간 후, 미국 정부가 ‘적국(敵國) 외국인’으로 간주, 일본계 사람들을 일제히 검거하는 데 이용되었다.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군사 활동에 중요한 것으로 간주 되는 지역에서 어떠한 인물도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군에 제공한다. 당시 미국 육군성과 서해안의 정치인들로부터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는데 일본계 미국인들이 과연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이 지역에서 모든 일본계를 배제할 군사상의 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명령이 바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Executive Order 9066)’이다. 일본 국적의 잇세이(一世)뿐만 아니라 미국 국적을 가진 닛세이(二世)를 포함한 일본인의 혈통을 받는 주민들을 모두 이전할 장소로 ​​출두하도록 고지가 이루어졌다. 준비를 위해 주어진 기간은 약 일주일이었고 지참을 허용한 것은 소지품 몇 가지뿐이었다. 물론 일본계 이주민뿐 아니라 30만명 이상의 독일계 이주민과 70만명 이상의 이탈리아계 이주민에 대해서도 지문, 사진을 등록하고 주소지를 조사해 이주를 제한한 바 있었지만 1만1000명 이상의 독일계 이주민과 이탈리아계 주민 3000명이 수용된 데에 반해 일본 출신들은 무조건 끌고 갔다. 

 

▲니하우 섬 사건(ニイハウ島事件)
하와이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수가 백인계 미국인들을 월등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잠재적 위험은 두 차례의 파업을 통해 어쩌면 통제불능 상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추측을 낳았는데 이러한 우려를 현실로 만든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니하우 섬 사건’(ニイハウ島事件, Niihau incident)이다. 

 

당시 일본제국해군은 하와이의 니하우섬을 하와이 공습 시 손상된 전투기들의 불시착지로 은밀히 작업을 한 바 있었다. 니하우 섬이 선정된 이유는 우선 하와이의 가장 북서쪽이었고 무엇보다도 ‘개인소유’라는 특징이 있었다. 1964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엘리자베스 싱클레어(Elizabeth Sinclair) 부인이 하와이 왕에게 1만 달러에 매입한 후 가문의 소유로서 당시 하와이 원주민들과 약간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진주만 공습을 마치고 돌아가던 제로기(零戦)가 이 섬에 불시착하였고 당연히 일본계 미국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잠수함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계 미국인들이 조종사 니시게치 시게노리(西開地重徳)를 목숨 걸고 보호했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로 원주민들의 반격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잇세이도 아닌 닛세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고 만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일본인들이 2년 반 동안 곳곳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은 최근에 ‘니하우’(Ni’ihau)라는 제목으로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었으며 니시게치 시게노리를 죽인 벤 카나헬레(Ben Kanahele)가 당연히 주인공이다. 

1942년 일본인 강제수용포고문(왼쪽). 2차 세계대전 일본인수용소(오른쪽 위)일본인 격리명령서(오른쪽 아래)

 

▲충성등록 27, 28호
1943년에는 미국 정부가 이른바 ‘충성등록’(忠誠登録, Loyalty Registration)을 했는데 인터뷰를 진행하여 일본인들을 분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질문들 중 27호와 28호가 매우 민감했다. 또한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잘못할 경우 일본으로 추방되거나 반미적 일본인들이 수용된 툴 레이크(Tool Lake) 수용소로 보내졌다. 

 

질문 27은 “당신은 명령을 받으면 어떤 지역에서든 미합중국 군대의 전투 임무에 복종할 것인가?”였고 질문 28은 “당신은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국내외 어떠한 공격에 대해서도 미국을 충실히 지키며 일본 천황, 외국 정부·단체에 충성·순종을 맹세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시겠습니까?”였다. 

 

소수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반발심을 갖고 거부했지만 다수는 받아들였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이 입대를 선택했다. 물론 자신들의 정체성을 미국인으로 당연히 생각하는 닛세이들에게는 이러한 ‘충성등록’이 모순되었지만 정체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했다. 

 

잇세이들 역시 현실적으로 일본에 돌아간다고 해도 더 나은 삶이 보장될 수도 없었고 오히려 역으로 ‘미국에서 보낸 스파이’로 의심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민의 역사를 지속시키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442 보병연대

 

▲442 보병연대(442nd Infantry Regiment)
약 3만 3000명의 일본계 미국인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군에 복무했으며 이중 2만명이 육군에 입대, 통틀어 800여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초창기에는 하와이 출신(100대대, 김영옥대령도 이 부대 출신)이 많았지만 이후 본토 출신들이 속속 입대하였으며 약 6000명의 일본계 미국인이 군사정보국(MIS)에서 근무했다. 

닛세이 부대

또 142명의 젊은 여성들이 여군(Nisei WAC)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이들은 주로 유럽 전선에 투입이 되었는데 태평양 전선의 경우 오인사격으로 인한 피해자가 나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MIS 랭귀지 스쿨’을 수료한 후 언어 학자 및 기타 비전투원 역할로 연합 번역사 및 통역사 섹션(ATIS)에 소속되어 일본군 문서를 해석하고 전쟁 포로를 심문했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 MIS 언어 학자들은 1만8000개의 문서를 번역하고 1만6000개의 선전 전단지를 작성했으며 1만명 이상의 일본 포로를 심문했다. 실제로 유럽전선의 100보병대대(닛세이대대, 二世大隊라 불림)는 “우리는 미국인이다”라는 구호 아래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이후 442 보병연대 창설의 근거가 되었다. 

 

한가지 여담으로는 442 연대전투단의 경우 부대 모토가 ‘Go for Broke!’(가서 죽어라!)였을 정도이며 100대대와 마찬가지로 그 유명한 ‘반자이돌격(バンザイ突撃)’을 감행하여 독일군을 궤멸직전까지 몰고 가는가 하면 삐에르 물랭(Pierre Moulin)의 책 『다하우, 홀로 코스트와 미국 사무라이』(Dachau, Holocaust and US Samurais)에는 1945년 4월 28일 이들 부대가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해방시키는 아이러니한 일도 일어났다. 

영화 '니하우'

 

▲에필로그
일본계 미국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해나갔으며 미국인들 사이에서 ‘전우’라는 인식을 충분히 심어주었다. 그들은 전쟁 기간 내내 노동력과 함께 부족한 징집인력을 보충해 주었으며 대부분 전후에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지 못했지만 정당한 미국인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더 이상 일본인을 비하하는 ‘JAPS’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영리한 닛세이’(The Nisei Intelligence)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들은 미국에 살아 남는 법을 터득하였으며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성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기반을 다져 나갔는데 이때의 교훈을 계기로 타 커뮤니티 출신들과의 결혼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전통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호감으로 변화되었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메이와쿠 가케루나, 迷惑)를 실천하여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의 접종율에서도 단연 미국 사회의 모범으로 불리고 있다. 한국계(백신 관광자 포함)가 49%, 흑인들의 경우 남자 10%, 여자 20%(2021년 5월 현재 기준)를 보이는 상황 속에서 일본계 미국인들은 무려 70%가 넘는 높은 접종율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미국인으로 볼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한 일원이라는 의식이 완전히 자리 잡았음에도 메이와쿠 문화만은 유지되기 때문으로 풀이되며, 사사건건 대립하는 중국계에 비교되면서 모범적 이민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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