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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을 위한 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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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30. 09:41

 

 

이동철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을 읽어보면 일본인들을 상대로 종종 몸을 팔며 살아가는 여성과 그녀를 사랑하지만 생활력이 없어서 스스로의 뜻과는 달리 기둥서방으로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970년대 서울 변두리의 판자촌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청소년기 저의 우울하고 염세적인 인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964년부터 한국은 반일이라는 슬로건 앞에서 카오스의 상태였습니다. 한쪽에서는 발작적인 반응으로 반일을 외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인 기생관광이 적지않은 외화의 공급원이었으며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불법체류하는 모순된 상황이 수십년간 이어져온 것에 대하여 저는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현상의 뿌리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대학강단에서 한국사를 후학들에게 가르치시는 저명한 교수님께서 이런 저에게 90년대초 방영된 MBC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적지않은 역할을 하였다고 말씀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여명의 눈동자는 1975년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추리소설작가 김성종의 동명소설을 각색하여 방송한 인기 드라마 였습니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전인 90년대초까지 주간지는 '썬데이 서울'이, 일간지는 '일간스포츠'가 성인오락물의 중요한 공급원이었고 1975년부터 연재될 당시 이 소설도 지나친 성적묘사로 인해 많은 비난과 당국의 시정명령이 있었습니다. 1991년 방영된 이 드라마 역시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여배우의 노출이 너무 지나쳐서 많은 시청자 항의가 있었고 저도 이 드라마를 볼 당시 '이정도 수위가 공중파에서 가능할 수 있구나' 라고 놀라곤 했습니다. 굳이 드라마 전개에 필요가 없을 것 같았지만 주연 여배우였던 채시라씨가 거의 전라인 상태로 촬영한 장면이 많았고 적지 않은 회차에 이런 Scene들이 방영이 되었습니다.

 

당시 반일이라는 주제앞에서 공중파에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장면에 대한 비판은 곧 잦아들어갔습니다. 사실 이미 1970년대부터 반일과 Sexual contents가 결합한 대중문화 상품은 점차 공급이 확대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국내 인기소설이었던 '마루타'는 주제와 연관이 별로 없는 상당한 수준의 성교묘사가 나오는 등 80년대 흔한 반일성인소설물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훗날 드러난 것이지만 이 소설은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赤旗)에 1981년부터 연재되었던 추리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의 소설 '악마의 포식 (悪魔の飽食)'을 표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일본 소설은 한국출판계에 영향을 준 것 뿐만 아니라 중공 인민해방군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제작된 영화 흑태양731( 黑太陽731)에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마루타'로 알려진 이 영화는 실제 사람시체를 이용하여 촬영한 끔찍한 장면이 주를 이루는 고어(Gore)영상물이였지만 한국에는 반일영화로 수입/소개되었고 많은 언론기사와 뉴스에서 어이없게도 이 영화의 장면을 아무런 확인없이 실제 증거 사진인양 보도하는 행태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994년 일간스포츠 신문에 연재된 이현세와 야설록의 만화 '남벌'은 26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시각에서 본다면 반일성인물의 끔찍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대히트중이었던 출간 당시에도 '아무리 반일을 주제로 한다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비판이 많았었고 이러한 하드코어물은 2014년 애장판 재출간 당시에는 독자들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받았습니다.

 

몇몇 반일영상출판물들의 상업적인 성공으로 인해 업계종사자들에게 이러한 반일성인물들이 대박은 못쳐도 평타는 친다는 인식이 있었고 급기야 2004년 여배우 이승연의 정신대 누드집이 나오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시에도 '저건 너무 나갔다'라는 인식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쌩뚱맞은 사진집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당시 업계성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1980년대 양산되기 시작한 자극적인 Sexual contents의 반일성인물들로 인해 한국의 대중사회는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하였고 90년대초에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뜨거운 분위기속에 1990년 한국교회여성연합과 이화여대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결성되었습니다. 1967년에 결성된 한국교회여성연합은 초기부터 위안부관련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개신교단의 여성평신도들도 구성된 이 단체는 민청학련 연루자들의 연락책과 지원활동을 주로 하였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던 1974년은 조총련에 의해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시해되는 등 조총련의 국내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였고 민청학련 사건 역시 2명의 일본인이 중형을 선고받았던 만큼 이 시기 일본 재일동포단체측과 연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교회여성연합은 이후 재일동포 취업차별을 이유로 일본 히타치(日立) 전자의 국내불매운동을 전개하였고 노동운동에도 적극 개입하였습니다. 1970년대초만 해도 한교연과 이화여대는 아직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국내여성운동 단체들은 한국내 성행하던 일본인 매춘관광과 현지처 이슈에 대하여 적극활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1964년 한일청구권협상 반대 시위가 그토록 격렬하던 시기에 위안부 관련 시위가 전혀 없었고 언론자료조차 찾기 힘들었던 원인에 대해 여기서부터 찾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록들을 찾아보면서 아이러니했던 것은 현재까지 국내 반일단체들이나 위안부 관련 단체들이 이런 활동을 하게된 Source의 원천이 대부분 일본인들의 창작물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정대협 창립멤버인 이효재 교수의 회고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활동가들 상당수가 일제시대에 중등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일본어의 구사에 문제가 없었으며 일본에서 발행된 서적이나 간행물들을 자주 접하여 왔었습니다. 윤종옥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 단체들이 위안부에 대해 인지를 한 결정적인 계기는 1973년 센다 가꼬오 (千田 夏光, 본명:千田 貞晴)의 저작 '종군위안부'를 통해서 였습니다.

 

중국 태생의 프리랜서 작가였던 센다 가꼬오의 이 책은 한국 여성단체들이 위안부 문제를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출간 이후 다른 학자들의 자료검증을 통해 많은 오류가 드러났고 작가 스스로 자의적으로 창작하여 기재한 부분이 있다고 고백을 하여 일본내에서는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화여대나 한교연 모두 기존에 그랬던 것처럼 실체도 잘모르고 자료도 없던 종군위안부 활동보단 눈앞에 생생히 일어나고 있었던 일본인 성매매관광에 집중을 하였습니다.

 

1990년부터 한일외교를 파국으로 이끈 가장 큰 도화선 역할을 한 사람은 전쟁기간중 자신이 제주도에서 수백명의 여성을 성노예로 강제연행 했다고 증언한 일본의 전쟁회고작가 요시다 세이지 (吉田 清治. 본명 吉田 雄兎)였다는 것은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요시다 세이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과거가 있는지는 한국에서 거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요시다는 본인이 도쿄대학과 호세이 대학을 다녔다고 했지만 어느 학교에도 학적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1939년 중화항공 상하이 지점에서 근무했다고 주장했지만 역시 근무기록이 없고 당시 이 회사에 근무했던 사람들도 요시다를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과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백범김구를 돕다가 일본군에 검거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민간인이 군사법원에 가는 경우는 없어서 추궁을 받자 국민당군과 내통하여 아편을 밀수하다가 징역2년형을 받았다고 번복하기도 하였습니다.

 

기행도 있었는데 결혼전에 자기보다 불과 4살 적은 이정욱이라는 조선인 남자를 양자로 입적하기도 하였고 본인은 양아들이 전쟁중 전사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전후 큐슈에 장착하여 살았고 노조활동을 하다가 1983년 죽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944년 2년의 복역기간이 끝나고 출소한 요시다는 시모노세키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노무보국회 동원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무리 전쟁말기의 혼란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전과자인 요시다가 어떻게 그 자리를 얻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사후 큰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기간중 아버지가 무슨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주도에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고 또 일본군인들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요시다는 1947년에 시모노세키 시의회의원 선거에 일본공산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하였고 이후 비료회사를 창업하여 큰돈을 벌었지만 10년만에 회사를 폐업하면서 큰아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실업자였던 요시다가 작가로 등단하게 되는 기회가 의외로 빨리 찾아왔는데 1963년 주간 아사히 공모전에서 전쟁기간중 노무 관리자 시절을 쓴 전쟁 수기 '나의 8.15'가 입상을 하면서 아사히 신문측의 눈에 들게 되었고 적지않은 상금도 받았습니다.

 

요시다가 위안부 관련 활동을 적극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7년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출간하면서 부터 였습니다. 당시에는 노무 동원부장으로써 조선부 출신 위안부를 중계하였다는 내용만 있었으나 이 시기 언론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점점 증언의 수위를 높혀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982년 강연에서 자신이 제주도에서 10명의 일본군 병사들을 대동하고 약 200여명의 젊은 여성들을 잡아다가 위안부로 넘겼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하였습니다. 패전이 임박한 전쟁말기 절망적이고 혼란한 상황에서 작은 섬마을에서 젊고 어린 여성 수백명을 짐승처럼 끌고나와 흙먼지 피어오르는 중국전선과, 피비린내 나는 필리핀과 인도차이나의 정글에 성노예로 보냈다는 증언은 대중의 관심과 특종에 목말라 있었던 많은 일본의 기자들을 열광시켰고 많은 언론사에서 별다른 검증도 없이 그의 증언을 기사화하였습니다. 이 시기 일본의 권위있는 전국지였던 아사히신문이 가장 열정적으로 1982년부터 1992년까지 10여년간 요시다의 증언을 다루었습니다.

 

요시다의 사후 그의 큰아들은 당시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이책을 써서 생계가 넉넉해졌다' 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여 기자에게 알린 적이 있습니다. 요시다만 돈을 번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 한국에서도 위안부관련 창작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윤정모 작가가 쓴 '에미 이름은 조센삐'라는 소설이 1982년 출간되었고 당시 대중문화의 시류에 맞게 성인영화 전문인 지영호 감독에 의해 동명 에로영화로 만들어졌고 1991년 개봉후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요시다의 증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3년 출간된 그의 증언록 '나의 전쟁범죄'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1989년부터 였습니다. 이책이 한국에 나오자마자 제주도 향토사학자들이 크게 분개하였고 요시다의 증언을 조목조목 규명하여 반박기사를 제주일보에 올렸으나 이 기사는 일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2년 일본의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가 이 기사를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하면서 요시다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이미 연재가 시작되고 얼마 안되어 요시다의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항의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는 조선에서 출생하여 성장하거나, 직장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증언에 신빙성에 대한 추궁이 이어지자 요시다는 증언을 여러번 번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아사히 신문은 1992년 기사 송고를 중단하였습니다. 戦時 여성에 대한 성착취와 같은 휘발성 강한 문제에 대하여 엄격한 검증과 확인을 먼저 주장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정치가는 서방자유주의 국가에서도 흔치 않았습니다. 이미 요시다의 증언은 아시아의 사정에 어두웠던 미국과 유럽의 외교관과 정치가들에 의해 유엔인권보고서나 맥두걸 보고서등에서 증거로 채택되었고 수많은 일본의 저술가들도 인용한 상황이었습니다.

 

1998년 언론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제 진실을 말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나에게도 자존심이 있어. 시간이 많이 지난 만큼 이제는 그냥 묻어두는 것이 좋치 않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요시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그의 사후 14년후 장남의 증언으로 겨우 확인되었습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요시다의 비밀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아사히 신문의 기자들은 1998년 마지막 인터뷰 이후 16년간 요시다의 증언을 역추적하였고 요시다의 증언을 기사화한지 32년만인 2014년 기사의 철회를 독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당시 훗카이도 신문과 교도 통신등 요시다의 증언을 올렸던 다른 언론사들도 행동을 함께 하였습니다. 아시히신문은 이후 엄청난 독자이탈과 소송을 당하며 크나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화여대의 윤정옥 교수는 1990년 1월 4일부터 同月 24일까지 한겨레 신문에 정신대란 주제로 4회에 걸쳐 칼럼을 기고하여 정신대문제의 권위자로 활동하였고 같은해 11월 정대협을 결성하면서 초대 공동대표를 역임하였습니다. 윤교수는 정작 역사학자가 아니라 영어영문학교수였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홋카이도와 오키나와 등지에서 본인이 조사하였다는 내용은 대부분 구술사학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90년 1월 4일 칼럼에서 종군위안부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는 홋카이도 개척시대의 요리집에서 일한 조선인 여성의 자살에 대해 많은 지문을 할애하여 글을 썼고, 1월 19일 3회에서는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록 '나의 전쟁 범죄'를 별다른 검증없이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명색이 대학교수이며 연구자였던 사람들이지만 사료에 대한 체계적은 검토와 계량화된 자료에 대한 분석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윤정옥교수와 이효재 교수등이 만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이름부터 지금까지 많은 비판이 있어왔습니다. 여자 정신근로대와 종군 위안부는 엄연히 상관관계가 없었습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많은 남자들이 전시 소집이 되어 전장으로 떠났고 그 빈자리를 여성이 도맡아야 했습니다. 38식 소총과 96식 경기관총은 전시 동원된 여학생들에 의해 생산되어 최전선에 병사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이러한 동원 형태는 비단 일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영국군 보병이 사용했던 Sten 기관단총 역시 영국의 젊은 여성들이 대량투입되어 막대한 양이 생산되었고 단돈 2파운드의 저렴한 가격에 성공적으로 보급하였습니다. 미국도 여성들을 소병기 뿐만 아니라 B29 중폭격기 같은 대형 장비 생산에도 대량투입하여 생산량 증대를 독려하였습니다. 소련은 병기생산 뿐만 아니라 대전차 방호벽 건설같은 공병작업에도 여성들을 아낌없이 투입하여 전쟁을 수행하였습니다. 많은 사학자들의 지적이 이어지자 정대협은 그동안 '정신대의 상당수가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논리로 해명하였으나 2018년에 슬그머니 이름을 정의기억연대로 바꾸었습니다.

 

요시다의 증언과 한국내 여론에 가장 놀란 것은 일본정부가 아니라 그때까지 전후 정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일본의 국민들이었습니다. 먼저 미야자와 총리의 사과가 있었고 수습에 대한 한국정부와 협의가 따랐으며 당시 노태우 정부 역시 신속히 TF를 구성하여 익명을 보장하고 피해여성을 찾았습니다. 약 300여명의 여성이 신고를 하였으나 서류등 증빙자료가 전무하여 교차검증과 증언 확인을 통해 230여명을 확정하고 이분들에 대한 지원을 준비하였습니다.

 

미야자와 내각을 이은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 총리는 사과담화에 이어 아시아평화여성기금을 만들어 피해자 배상에 나서려고 했습니다. 대부분 고령이었고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던 할머니들은 각종 행사에 끌려다니기 싫어했고 얼마남지 않은 인생을 위해 기금의 도움을 받고 살고 싶어하셨습니다. 당시 기금발기인으로 중요한 역활을 하였던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는 기금을 수령하기 원했던 고령의 노인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이어가던 한국의 시민단체들에게 큰 실망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1997년 2월 27일 ‘정신대문제 어디까지 왔나’ 세미나에서 윤정옥 교수가 ‘아시아여성기금을 받는다면 자원해 나간 공창이 되는 것’이라고까지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에 격분한 와다 교수는 서신으로 항의하였고 이 내용을 훗날 한국의 언론사에 회고하였습니다.

 

'기금이 “‘매수공작’을 했다는 건 할머니들의 행동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돈에 눈이 먼 결과라는 게 되고, 할머니들을 멸시하는 셈이 돼버리지 않습니까.” 할머니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재단할 권리는 누구로부터 부여받은 것인가요. 민족의 입장에서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주체성을 존중받아야 합니다.”

 

아래 역시 와다 교수 회고입니다.

'98년 김대중 대통령 때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할머니들에게는 3150만원을 일시금으로 준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도 나는 몸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되면 돈과 돈의 싸움이 돼버린다. 나는 대통령에게 몇번인가 편지를 보냈다. 그 해 말 무라야마 총리와 나는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 충정을 호소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말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선의로 추진된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정부는 피해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일본한테서 받지 말라거니 받아라거니 얘기하지 않을 방침입니다. 운동단체나 피해자와 잘 얘기해 보고 받고 싶으면 받으면 되고, 위령탑을 세우는 게 좋겠다면 세우는 것도 괜찮겠지요. 한 번으로 얘기 결론이 나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얘기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노태우정부를 이은 김영삼 정부는 반일적인 성향이었지만 한일협정을 존중했고 이 것은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졌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박정희 정부 시대인 1970년대에 집행된 개인청구권 보상이 부족하였다는 정치적 결정하에 소급하여 개인배상을 한국정부예산으로 하였고 일본에 청구권이 없음을 재확인하였으며 이 결정 당시 문재인도 청와대의 일원이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시대 정대협의 활동이 극에 달하며 일본 정부의 재사과와 재보상 사업이 있었으나 문재인 집권기 파기됨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한국에서만 61명이 수령하였고, 화해와 치유재단의 기금은 37명이 수령한 것을 마지막으로 조용히 해산하였습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노인들은 김대중 집권기 정대협에 의해 정부지원에서 배제되었고 이중 33인이 모여 무궁화할머니회를 만들어 정대협과 투쟁하였으나 언론의 철저한 무시와 무관심속에 잊혀져가셨고 지금은 대부분 요단강을 건너가셨습니다. 박복순 할머니 장례식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마지막을 지켰고 화장비도 일본사람들이 지불하여 고인을 수습하였습니다. 정대협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단체 사람들은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요집회의 빈자리는 중국에서 데려온 노인들도 채워졌습니다.

 

정대협은 지난 30년간 막강한 자금력과 언론장악력을 가진 권력으로 군림하였습니다. 이러한 존속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이익집단이 함께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많은 영상출판 종사자들은 전쟁성착취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포르노물과 자극적인 창작물들을 만들어 돈을 벌었습니다. 종종 반일을 내세워 재재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마오주의자들도 조총련과 일본공산당과 드러내놓고 연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위안부 문제를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유주의 국가들의 동맹을 무너뜨리는 수단으로 요긴하게 활용하였습니다. 여성단체들 역시 위안부문제는 가장 중요한 핵심권력 및 수익사업이었습니다. 적지않은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을 배출하였고 실정법을 어겨도 재재할 수 없는 Untouchable 이 된지 오래입니다. 방송사들은 이익단체들의 증오마케팅 생태계가 지속될 수 있도록 실증자료와 진실을 찾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모함하며 이 권력에 부역하였습니다.

 

젊은 시기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노인들은 결국 여러 집회와 언론에 자신 과거를 드러내야 했고 노년에도 고달픔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상당수 할머니들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저에게 다시금 우울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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