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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이해 | 베트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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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17. 22:52
 

 

1. 베트남의 일반 현황
2. 베트남은 어떤 나라인가?
3. 왜 베트남(越南)인가?
4. 베트남의 기원
5. 중국의 지배
6. 베트남의 독립왕조
7. 프랑스의 지배와 베트남의 근대
8. 베트남전쟁

 

 

 

베트남의 정식 명칭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사회주의’국가이다. 베트남의 지형은 길다란 S자형으로 동,서가 아닌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베트남의 인종 분포는 비교적 복잡하고 다양하여 54개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54개의 민족중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비엣족으로 전체 인구의 80퍼센트가 조금 넘는다. 이들은 대체로 평야지대에 거주하며 역사상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아왔다. 비엣족의 언어는 중국어처럼 성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때는 시노-티베트어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귀, 코, 입이라든가 쌀, 벼와 같은 일상생활의 기본적은 어휘의 성격이 캄보디아의 크메르어와 유사하다는 판단 아래 통상적으로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가운데 몬-크메르어계로 분류된다.

 

 

 

 

베트남의 역사는 투쟁, 피지배, 전쟁, 독립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 정도로 해일 속의 쪽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국가에서부터 한나라의 정복 그에 대한 저항, 당의 지배와 민족독립을 향한 전진, 몽골의 침입, 명의 베트남 지배, 프랑스의 식민 지배정책, 제 2차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등 수 많은 나라의 수 많은 침략 속에서 베트남은 버텨온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많은 침략 전쟁과 민족적, 국가적 위기 상태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항상 힘써왔다는 점에서 베트남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다 할 수 있다.

 

수많은 침략과 전쟁 속에서 베트남은 어떻게 나라와 민족을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는지 살펴 보기 위해서 본 내용에서는 침략과 저항에 대한 부분은 집중적으로 서술하였다. 또한 베트남에게 다가가 주변국, 혹은 열강의 틈 사이에서 어떻게 우뚝 설 수 있었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독립왕조에 관해서도 따로 서술하였다. 국가 존망과 개인의 생존이 달린 순간을 천천히 살펴보다 보면 그 나라의 민족성 또한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꼭 침략의 역사 뿐만 아니라 베트남 역사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어 초대국가의 건국설화부터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 까지 포괄적인 내용을 요약 정리 하였다. 또한 독립왕조에 대해 중요성을 인정하여 독립왕조는 별도로 본론에서 서술하였으며 당 이후 중국의 침략은 독립왕조 서술시에 함께 서술하였다.

 

 

1. 베트남의 일반 현황

1) 국 호: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2) 면 적: 330,991 ㎢(한반도의1.5배)

3) 수 도: 하노이(Ha Noi)

4) 주요도시: 호찌민시, 다낭, 하이퐁, 껀터

5) 행정구역: 5개 직할시, 58개 성(省)(2008.8.1 하 떠이 성이 하노이에 편입)

6) 인 구: 약 8,700만

7) 종 족: 54개(낀족 약90% + 53개 소수민족)

8) 언 어: 베트남어

9) 종 교: 불교, 천주교, 기독교, 까오 다이교, 호아 하오교 등

10) 기 후: 북부-아열대

11) 남부-열대 몬순 기후

12) 연평균 기온- 24.1℃

13) 연평균 강우량-2,151mm

14) 주요항구: 사이공(River Port 임), 하이퐁, 다낭, 껀터

15) 화폐단위: 동(Dong)-환율:USD 1= 약19,200동(100불짜리 지폐 경우)

16) 시 차: GMT +7(한국보다 2시간 늦음)

17) 전 력: 220V/50Hz

 

 

 

 

 

 

 

2. 베트남은 어떤 나라인가?

가. 강인한 나라

나. 남방예의지국

다. 단결력이 강한 나라

 

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나라를 꼽으라면 베트남을 빼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였던 몽고제국은 중국+만주+한반도+동남아+중앙아시아+서남아시아+동유럽+러시아 남부까지 영토를 차지하였었지만, 바로 발밑의 베트남은 원 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1283년, 1284년, 1287년 3차례에 걸친 침략을 막아낸 민족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의 고려 조정은 몽고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1253년 항복하고 말았다.

 

또한 1858년 말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호찌민 주석이 이끄는 베트남군은 라오스 국경의 난공불락의 요새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1946년에 시작된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로써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즉각 철수 하며,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해 북쪽은 호찌민 정부가 통치, 남쪽은 프랑스가 내세운 바오다이 황제 체재를 유지하되 2년 후 남북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하였다.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은 강력한 미국의 남부 베트남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부 베트남을 무력으로 통일하여 미국에 실패를 안겨준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3. 왜 베트남(越南)인가?

찌에우 다(趙佗)는 B.C 207년 중국 광동성과 광서성 일대를 중심으로 남비엣(南越)을 세우고 스스로를 무왕(武王)이라 칭하고 어우락국을 침공하여 정복시켰다. 남비엣은 B.C 111년 한(漢)무제의 공략으로 멸망했다. 1802년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阮)왕조를 세운 자롱 황제는 국호를 남비엣(南越)으로 하고자 청나라의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청나라 황제는 남비엣(南越)을 비엣남(越南)으로 뒤바꾸어 베트남(越南)이란 나라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다.

 

청나라가 남비엣(南越)을 거부한 이유는 찌에우 다(趙佗)가 중국 사람이지만 진시황의 잦은 대외전쟁과 대규모 토목공사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 틈을 이용 중국 남방과 북부베트남의 홍하강 델타에 이르는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한(漢)나라와 대등한 독립왕조임을 주장했던 사람인데다가, 응우옌(阮)왕조를 세운 자롱 황제는 이의 역사성을 부각시켜 중국의 영토를 넘보는 야심가로 보았기 때문이다. 찌에우 다(趙佗)는 중국의 관리로 출발하여 중국과 대립하는 왕조를 세운 인물로 중국에서는 이단자로 보았지만 베트남에서는 찌에우 다(趙佗)를 중국의 침략에 대항한 위대한 황제로 숭앙했다.B.C 137년 찌에우 다(趙佗)의 사망으로 한나라와의 균형이 깨지고 결국 B.C 111년 한(漢)무제의 공략으로 멸망하였다.

 

 

4. 베트남의 기원

1) 건국설화

베트남 건국설화는 중국 신화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농씨의 후손인 데 민이 아들 응이를 낳고 남방으로 가던 도중 우링(난링산맥)에 이르렀다. 우링에서 데 민은 부 띠엔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 록 뚝을 낳고, 데 민은 북방을, 록 뚝은 남방을 다스리게 하였다. 록 뚝은 턴 롱을 아내로 맞아 락 롱 꿘을 낳았고 락 롱 꿘은 록 뚝의 뒤를 이어 남방의 왕이 되었다.

 

그 뒤 북쪽의 데 라이가 침략해 왔을 때 락 롱 꿘은 데 라이의 부인인 어우 꺼를 유인하여 딴 비엔 산으로 데리고 갔으며 락 롱 꿘과 어우 꺼 사이에서 알 하나가 나오고, 이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태어나게 된다. 이들이 백월족의 선조이다.

 

락 롱 꿘과 어우 꺼는 아들을 50명씩 데리고, 락 롱 꿘은 바다로, 어우 꺼는 산으로 가서 살았으며 산에 남은 50명 중에서 가장 강한 자가 최초의 훙 브엉(웅왕)으로 봉해져 왕위를 계승했는데, 나라이름을 반 랑이라 했다. 이 반 랑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이다. 흥 브엉이 통치한 반 랑의 중심은 메린으로 홍 강 델타의 중추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반 랑은 기원전 3세기 후반 멸망할 때 까지 총 18명의 왕이 지배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들 역대 왕들은 모두 훙 브엉이라고 불렸다.

 

 

 

 

오늘날의 베트남 사람들은 락 롱 꿘과 어우 꺼를 자기네 시조로 생각한다고 한다. 현재에도 훙 브엉을 기념하기 위해서 음력 3월 10일이 되면 빈 푸 성에 있는 훙 브엉의 사당에서 성대한 제사를 올린다. 반 랑 이후, 안 즈엉 브엉은 반 랑을 정복한 뒤 자신의 나라와 합쳐 어우 락 왕국을 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안 즈엉 브엉의 조부는 훙 브엉의 딸 미 느엉에게 청혼을 했으나 반 랑의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 하였다.

 

이에 한을 품은 안 즈엉 브엉의 조부는 후손들에게, 적당한 기회가 오면 반 랑을 멸하여 자신의 한을 풀어 달라고 유언 하였다. 당시 훙 브엉은 정세를 돌보기 보다는 심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었다. 이를 감지한 안 즈엉 브엉은 반 랑을 공격하였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훙 브엉은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 하였다고 전해진다.

 

반 랑, 어우 락 이외에 레 반 흐우에 의하여 진정한 의미의 베트남 역사로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나라는 찌에우 다의 남 비엣이다. 남 비엣은 난하이 군 룽촨의 현령이었던 찌에우 다가 북쪽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할 계획을 세우던 런샤오의 포부를 이어받아 실천에 옮긴 결과물이다. 진이 멸망하자, 찌에우 다는 구이린 군과 샹 군을 병합하여 남비엣을 세우고 수도를 지금의 광둥 성 판위에 정하고 스스로를 무왕이라고 칭하였다. (B.C. 207) 남 비엣은 중국으로부터 독립의지가 강한 나라였으며 한 고조 또한 이런 의지를 간파하여 남방을 평화적으로 평정하기 위해 남 비엣 왕으로 책봉하였다. 찌에우 다는 한과 화친을 맺은 후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어우 락과 병합하기에 이른다.

 

5. 중국의 지배

1) 한의 지배

남 중국에서 시작 하여 북부 베트남을 병합해 두 지역을 최초로 통일 시킨 찌에우 다의 통치하에 유지되었던 남 비엣과 한 제국 사이의 균형은 기원전 137년 경에 그가 사망하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찌에우 다의 뒤를 이은 그의 손자 반 브엉은 유약한 인물로 즉위 뒤 민월이 쳐들어오자 응전하기 보다는 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 일로 반 브엉의 남 비엣은 점점 한에 예속되기 시작한다.

 

장자 아인 떼를 한에 볼모로 보내였으며 후에 왕이 되는 아인 떼의 왕 후는 한나라 여자였다. 아인 떼의 사후에는 아이 브엉이 왕위에 올랐는데, 아이 브엉 즉위 시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아이 브엉의 어머니 이자 아인 떼의 부인인 한나라여자 주씨가 섭정하였다. 한나라는 이를 기회로 삼아서 남 비엣 내에서 영항엵을 강화하였고 한의 법률을 시행하며 왕에게는 한에 입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토착세력의 반대에 부딪쳤고 남 비엣은 친한파와 반한파로 나뉘기에 이른다. 한은 친한파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보내고 남 비엣의 수도 판위를 점령하고 현지에 7개 군을 설치하였다. 한의 지배를 받는 동안 현지의 저항이 없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는 쯩 짝, 쯩 니 자매의 대규모 저항운동이 있는데 당시 한나라 법에 의해 처형당한 남편의 복수를 위해 증 짝이 봉기하여 쟈오 찌 중심부를 공격한 것이다. 토착세력의 협력에 힘을 얻은 증 짝은 세력을 확대하고 메 린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기에 이른다.

 

이에 후한의 광무제는 마위안과 3만의 병사에게 진군을 명하였고 마위안은 증씨 잔당을 토벌하여 남쪽 까지 진격한다. 마위안의 원정 이 후 토착 지배계급의 이름들이 사라지고 한과의 혼혈인 들이 지배계급을 대신하는 등 베트남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후한이 쇠락해 가자 시간이 지날수록 베트남 토착세력들의 한에 대한 저항은 커져만 갔다. 베트남에서는 후한 조정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토착사회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었다.

 

2) 당의 지배

당은 자기에게 복속한 주변 민족들에 대해 대체로 자치를 허용했지만, 상당히 강력한 몇몇 민족에 대해서는 자치를 맡길 수 없어 도호부를 성치하고 이들을 감시했다. 당시 주요 도호부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에 설치된 안동도호부를 비롯하여 여섯 개가 있었는데, 안남도호부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안남은 남쪽을 안정시킨다라는 뜻으로 이때부터 베트남은 중국인들에 의해 안남으로 불려졌다.

 

당이 한 무제 이래 800년 가까이 중국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있었던 베트남에 새로운 정복지와 동일하게 도호 행정을 실시한 것은 이전부터 중국이 추구해 온 군현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중국의 태도가 미온적으로 변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이 직접 지배를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안남도호부는 다른 도호부들이 당의 의욕적인 진출에 의해 설치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당의 지배는 몇몇 반란들에도 불구하고 이전 어느 때 보다도 안정을 이루었다. 당 지배기 주목할 저항 운동으로는 마이 툭 로안이나 풍 흥에 의한 것들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베트남의 독립을 꾀하였다.

 

이와 같이 당의 식민통치에 대한 베트남인의 저항은 상당히 격렬했고 민족적 자긍심도 높았던 만큼 당 문화의 영향도 제한적이었다. 그렇지만 당의 지배가 300여 년 동안 지속되면서 중국 문화의 영향이 앞선 어느 시대보다도 크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프랑스 중국학의 대가인 앙리 마스페로는 마위안의 원정 이후 중국 문화는 베트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그는 베트남이 독립을 한 후 이웃 국가와 달리 긴 시간 동안 중국의 거듭된 침략을 물리 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행정제도, 사상, 사회제도 등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응집력을 강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스페로의 주장과는 달리 베트남이 중국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15세기 레 왕조가 성립된 다음부터이고 그 이전, 특히 중국 식민지 시기에 베트남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주목할 것은 레 왕조의 법에서 당률을 수용한 부분은 주로 지배자에 대한 충성, 궁중 예절, 관리의 행동규범 등 지배권력의 유지와 관련된 사항들이 많다라는 점이다. 반면 결혼풍습이나 가족제도 등 에서는 베트남의 관습법이 그대로 반영되어있어서 베트남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 하였다.

 

 

 

 

6. 베트남의 독립왕조

1) 응오왕조

당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 906년 정해절도사의 직을 이어받은 쿡트 아미는 양나라에 복속하고 남한에 항거하였다. 남한조정은 정해에 군대를 보내 이를 복속시키고 자오쩌우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자오쩌우의 무인들 간의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권력투쟁에서 이긴 응오꾸엔은 남한의 군대를 물리치고 939년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응오꾸엔은 939년 꼬로아에 도읍을 정하고 왕권체제를 확립하려하였으나 무인 즈엉땀카에 의한 왕위찬탈로 국내가 어지러웠고 뒤이어 12사군의 군웅활거시대가 945년부터 967년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응오왕조는 왕조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곧 딘왕조로 이어졌다.

 

2) 딘 왕조

십이사군에 의해 혼란에 빠진 베트남을 통일로 이끈 사람은 십이사군외의 인물이였던 딘 보 린이였다. 십이사군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기존의 정치체제와의 연관이 있던 지배계층이였지만 딘 보 린은 농민 출신의 지도자였다. 딘 보 린의 아버지인 딘 꽁 쯔는 남부 국경지대인 호안 쩌우의 자사였는데 아버지 사후 그 자리를 이어 받아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딘 보 린은 십이사군을 통합한뒤 968년에 황제에 올라 띠엔 황이라고 칭하고 국호를 다이 꼬 비엣이라 하고 도읍을 호아르에 정했다. 다이 꼬 비엣의 이름은 1054년 리 왕조의 3대 왕 타인 똥이 국호를 다이 비엣으로 바꿀 때까지 존속하였다. 딘 보 린은 문무백관의 직제를 만들어 공신들에게 포상하고 형벌을 엄하게 하여 사회의 무질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등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하고 새로운 왕조의 제도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자오쾅인이 송나라를 세워 각지의 세력들을 병합하고 있었다.

 

후에 딘 보 린과 딘 리엔이 죽자 그의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인 딘 또안이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딘 보 린은 띠엔 호앙 데로 추존되었다. 이때 대장군 레 호안은 섭정으로 있으면서 황태후 즈엉씨와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고 자신을 부왕이라 칭하기 까지 했다. 이에 정국공 응우옌 박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내분의 소식을 들은 송은 베트남을 병합하기 위해 진군하였고 국가의 존망의 위기에 j한 베트남에서는 황태후가 레 호안으로 하여금 군사를 선발하여 송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이때 대장군에 임명된 팜 끄 르엉은 출정에 앞서 군사회의를 열어 황제 딘 또안이 어려 긴급상황에 대처할 수 없으므로 황제의 자리를 레 호안에게 물려주도록 요구하였고 딘 또안을 옹호해 줄 만한 세력이 이미 제거된 상황이라 레 호안은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전 레왕조를 건설한 레 호안은 다이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였으며 그렇게 딘 왕조는 막을 내린다.

 

3) 띠엔 레 왕조

레 호안이 연호를 티엔 푹으로 정하고 딘 또안은 베 브엉으로 삼으며 띠엔 레 왕조의 문을 열었다. 한편 레 호안은 981년 강력한 송나라의 침략을 막아낸다. 993년 송나라는 레 호안으로 하여금 교지군왕에 봉하였고 997년에는 남빈브엉에 책봉하였다. 레 호안은 송 황제의 조서를 받들 때도 절하기를 기피하는 등 신하의 예를 하지 않기 위해서 힘썼다.

 

남북으로 대외문제를 평정한 레 호안은 왕조의 권위를 드높이고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내치에 전념하였다. 도읍인 호아 르를 웅장하게 조성하고자 하였고 티엔 푹이라는 동전을 만들어서 사용하였으며 군제를 개혁하고 특히 강건한 자를 선발하여 친위군으로 삼는 등 많은 노력을 가하였다.

 

 

 

 

레 호안에게 주어진 과제는 딘 보 린 이래 아직도 지방에서 준동하고 있던 반대세력들을 소탕하는 것이였는데 그는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이를 평정하였으며 그로인해 강화된 권위로 일종의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레 호안은 재위 24년 동안 그 나름대로 독립의 기틀을 굳건히 다진후 1005년 세상을 떠난다. 그가 후계자 문제를 확고히 하지 못한 채 사망하자 아들들 간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졌고 다음 제위에 오른 쭝 똥이 사흘 만에 동생 롱 딘에 의해 사망하여 베트남은 롱 딘이 통치하게 된다. 롱 딘은 모든 일을 누워서 통치한다는 뜻인 와조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잔학함과 향락으로 악명이 높았다.

 

롱 딘 사망 후 그의 아들들이 서로 권력을 다투었지만, 친위전전지휘사인 리 꽁 우언이 관리들과 승려들의 지지를 얻어 제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리 왕조의 타이 또이며 이로써 띠엔 레 왕조는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4) 리 왕조

베트남은 리 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다. 리 왕조는 오늘날 베트남의 수도인 탕 롱에 도읍을 정하고 행정체제를 정비하였다. 리 왕조 9대인 216년간은 훗날 베트남의 역사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리 왕조는 고려 초기의 경우와 비슷하게 지방 호족세력과의 타협 및 연합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나 갔다. 리 왕조의 정권은 대내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송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다.

 

 

 

 

리 왕조의 건국자인 타이 또는 이전 두 왕조의 국호였던 ‘다이 꼬 비엣’의 명칭을 그대로 계승했으며, 황후가 여럿이던 관례도 답습하여 6인의 황후를 두었다. 이처럼 타이 또는 호아 르 왕조들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더 나아가 델타 중심부의 주민들까지도 아우르는 새로운 전통을 형성시키려 애썻다. 타이 또는 민간신앙뿐만 아니라 불교의 보호에 지대한 과심을 쏟았으며 리 왕조의 역대 황제들도 불교를 신봉하고 보호, 장려함으로써 왕조의 영속을 꾀하였다.

 

1028년 타이 또 사망 후 왕자들의 난이 발생하였고 타이 똥은 난을 진압하여 제위에 올랐다. 타이 똥은 즉위 한 후 왕권강화를 위해 힘썻으며 매년 4월에 혈맹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군권을 강화하여 권위에 도전하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해 황제 직속의 금군십위를 설치하였으며 불교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옹호하였다. 불교 뿐 아니라 유교의 영향 또한 서서히 나타나서 1040년에 들어서면서는 유교의 영향력이 점점 뚜렷해졌다.

 

타이 똥의 27년이란 재위기간 뒤 황태자 년 똔이 제위에 올랐다. 바로 그가 타인 똥이다. 타인 똥은 즉위하자마자 국명을 딘 왕조 부분에서 언급하였듯이 다이 꼬 비엣에서 ‘꼬’자를 뺀 다이 비엣이라 하였다. 이는 호아 르 전통에서 탈피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런 그의 의지를 보여주듯이 그의 통치하에서 베트남의 이전 보수적인 전통유지 보단 중국의 문화들이 이전 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1059년에는 모든 신하들에게 조회 때 반드시 중국식 모자를 쓰고 중국식 신발을 신으라는 칙령을 내렸을 정도이다.

 

년 똥 시대에는 최초로 과거제도가 실시되고 턴 똥 시대에는 농업생산을 진작시키기 위한 노력을 가하는 등 리 왕조의 왕들은 모두 치세에 힘썻다. 턴 똥 시기에 특별히 적을 만한 사건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왕조가 침입한 사건이다. 캄보디아가 대외적으로 팽창정책을 펼치며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수리야바르만 2세는 베트남을 침략하였다. 두 차례의 침략 후 두 나라의 화약이 있었으나 캄보디아는 이를 무시하고 세 번째 침략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턴 똥 뒤 아인 똥 때에는 중국과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서 송은 전례를 아인 똥에 대해 전례를 따랐으나 1164년에 이르러서는 안남국왕으로 책봉하여 베트남이 독립국가임을 승인하였다. 이런 변화는 당시 송이 금의 압박에 밀려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베트남 회유가 목적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황제를 거쳐 리 왕조도 여느 왕조와 같이 쇠퇴기를 걷게 된다. 베트남 최초의 장기 왕조였던 리 왕조는 쩐 투 도의 찬탈극으로 인하여 막을 내렸다.

 

 

5) 쩐 왕조

쩐투도에 의하여 집권된 쩐 왕조는 12대에 걸쳐 175년간 계속되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원태조는 사방으로 국력을 넓혔다. 원나라장수 우렁허타이는 쩐타이똥이 원나라에 복속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로인해 쩐 왕조와 원나라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쩐 왕조는 처음부터 왕실귀족에게 특권을 주어 이들로 하여금 행정과 군대의 고위직을 독점케 하였는데 과거를 통해 선발된 관리들이 조정 내에서 발언권을 갖기 시작한 것은 바로 원나라의 침입 이후 부터이다. 1257년 원나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쩐 왕조는 언제 다시 쳐들어 올지 모르는 원나라에 대해 유교적으로 소양을 쌓은 문사들을 이용하여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쩐년똥 때에는 원나라의 침공으로 국토가 황폐해 졌고 쩐꾸억뚜언이라는 유능한 장수 덕분에 위기를 넘겼으나 7대 쩐주똥부터는 국력이 심히 쇠약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참파의 침입, 불교계의 부패, 원을 대신하여 중국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 명의 과도한 조공 요구, 농민과 승려의 반란 등 점점 몰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쩐왕조는 왕의 외척이였던 레꾸이리의 왕위 찬탈에 의하여 12대 티우데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6) 레 왕조

명나라의 지배가 시작되자 레 러이는 명나라의 군대에 맞서기 위해서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명나라의 군대를 쫓아내고 독립을 되찾아 1428년 레 왕조를 창설하였다. 베트남 역사상 가장 오래된 왕조인 레 왕조는 초기에 타이 또에 의해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사회가 재건되고 행정체계가 확립, 토지제도가 개혁되었다. 타이 또는 레 왕조 권력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소수민족들의 저항에도 직접 군대를 이끌며 진압하였다.

 

 

 

 

타이 똥 시기에는 레 쌋이 섭정을 하였는데 그는 문신을 없애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문무 요직에 임명한 후 과두정치를 행하였다. 타이 똥은 성장하면서 레 쌋과 그 집단이 무학출신으로서 권력을 독점하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문신과 유학을 존중하고 장려하였다. 또한 과거제를 확립시키고 인재등용에 힘썻다.

 

년 똥의 재위기간 중에는 주목할 만한 것이 있는데 바로 1449년에 반포된 법령이다. 이는 사유재산의 소유와 재산의 상속문제 등을 다루는 것이였는데 이 법령에 의하면 가족재산은 남편의 재산, 처의 재산, 부부 공유의 재산으로 나누어지고 부부가 사망하면 자녀들이 서로 똑같이 나누어 갖게끔 하였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재산이 가족의 공동소유이며 상속권은 아들에게만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베트남의 제도가 중국보다 훨씬 근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년 똥의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른 응이 전에 대해 개국공신들의 불만으로 의하여 대의를 명분으로 쿠데타로 타인 똥이 즉위하게 된다. 그의 치세 동안 베트남은 역사상 보기 드문 안정과 번영을 누리는데, 대내적으로는 각 방면에 걸친 모든 제도를 완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참파를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타인 똥은 칙령을 내려 토지조사를 실시해서 토지대장인 전부를 작성하고 호적은 3년에 한 번 수정 하되 6년 째에는 완전히 개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외에 관개시설을 정비하여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농업 외에도 광산의 개발이나 양잠을 장려하여 토지 없는 농민들을 체제 안으로 껴안으려 노력하였다.

 

유교의 발전과 관련해서는 처음으로 오경박사를 두었으며 또 한 국립대학 태학을 증축하였고 과거를 장려하고 회시를 실시하였다. 유교의 지위가 확고해져 자연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걸었고 타인 똥 치세 후기에는 많은 승려가 환속을 하고 여러 사원에서는 선학 강의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확립되자, 타인 똥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주변국가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1470년에 침략해온 참파 왕 반 라 짜 또안에 대하여 직접 25만의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라 수도 비자야를 점령하고 왕을 생포하였다. 남방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끈 뒤에 서벌에도 힘썻으며 루앙프라방까지 함락시켜 다이 비엣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했고 인근 주변의 소수민족들은 조공을 받쳤다. 그러나 타인 똥 때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우이묵 때부터 국력이 쇠약해졌으며 권신들에 의하여 조정이 어지러워졌다. 꿍 호앙 데를 마지막으로 막당중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오랜 기간 지속 되었던 레 왕조의 정통은 끊겼다.

 

7) 응우옌 왕조

레 왕조의 타인 똥 사후, 레 왕조는 쇠퇴기를 맞게 되었고 권신 막당중은 꿍 호앙 데를 폐위시키고 막왕조를 건설하였다. 막왕조의 출범과 함께 베트남은 레 왕조 시절 권신들에 의한 레 왕조 중흥의 남조와 막왕조의 북조 간의 65년에 걸친 남북조시대를 보내게 된다. 이로 인하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약 2세기동안 베트남은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맞게 된다. 레 중흥세력들은 일찍이 중흥기간동안의 실권다툼에서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즉, 1558년부터 시작된 권력대립으로 왕은 허위에 불과하였고 모든 실권은 찐가와 응우옌가의 수중에 있었다.

 

떠이 썬 3형제의 봉기로 1788년 레왕조 후기가 멸망함으로써 베트남은 다시 통일 되었다. 베트남 최초의 농민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떠이 썬 3형제는 응우옌가의 수도를 점령하였고 응우옌가의 실권자들은 남부지역으로 달아났다. 떠이 썬 군대는 또한 북의 찐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탕롱을 점령함으로써 북의 찐가를 멸하였다.

 

이에 찐가의 세력들과 레왕조는 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청의 군대가 베트남을 침공하자 떠이 썬의 응우옌 후에는 1787년 자신을 꽝쭝황제라 칭하고 청나라 군대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떠이 썬 3형제의 불화로 인해 실제로 베트남의 영토가 중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3분된 상태였는데 남부의 응우옌가의 응우옌 푹 아인이 프랑스 신부 삐뇨 등의 도움으로 꽝쭝 황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베트남을 통일한다. 그는 응우옌 왕조를 창건하고 국호를 베트남으로 바꾸고 푸쑤언에 도읍을 정한다. 푸 쑤언은 오늘 날의 후에이며, 응우옌 푹 아인은 북진에 앞서 연호를 쟈 롱이라 하였다. 쟈 롱은 쟈 딘에서 탕 롱까지라는 의미로 베트남 전체를 의미한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응우옌 왕조를 출범시킨 세조 쟈 롱 황제는 주변 소국들에 대한 정벌을 시작하였고 , 내적으로는 지방행정제로를 청의 것을 많이 모방하였다.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법전을 편찬하기도 하였고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지배하는데 필요한 참고자료들이 편찬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팽창정책을 펼치던 쟈 롱 황제는 캄보디아를 세력권 안으로 넣었다.

 

쟈 롱 황제의 뒤를 이은 민 망황제는 베트남을 한층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전환시킨다. 대외적으로도 공세를 취해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해 침략적인 정책을 썻으며 내부에서 일어나는 많은 반란, 대표적으로 레 반 코이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끊임 없는 반란의 진압 후 민 망 황제는 교육을 통해 문화적으로 남부를 중앙 조정에 통합시키려고 하였으며 이주민들이 정착할 때 개척한 사유토지를 인정해 주고 또 새로운 개척을 장려하는 등의 노력의 결과 남부 또한 중앙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베트남의 일부를 형성하게 하였다. 뜨 득 황제 때에는 많은 레 왕조의 후예를 칭하는 자들의 반란이 있었으며 근대적인 무장으로 팽창하던 제국주의 세력인 프랑스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다.

 

 

7. 프랑스의 지배와 베트남의 근대

1)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치세 시절, 프랑스는 해외로 팽창정책을 시작 하였다. 이 대상으로서 베트남도 예외도 아니였으며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해서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었다. 베트남 침략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집단은 바로 카톨릭과 상공업자 그리고 해군이였다. 코친차이나 위원회는 프랑스 장교들이 응우옌 아인 푹을 도와주었었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에 대해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후에 왕조에게 그리스도교의 자유 보장, 프랑스의 통상 대표부 설치, 프랑스 영사 임명 재가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응우옌 왕조는 세 가지 조약 모두에 대하여 거절을 표명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식민화의 첫발을 내딛기 위하여 스페인과 연합해 베트남 침입을 실행에 옮겼다.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은 다 낭 항구를 점령하였으며 수개월 동안 머물렀다.하지만 이질, 콜레라 및 괴혈병 등과함께 응우옌 찌 프엉의 견고한 방어로 진격할 수 없게 되자 다 낭에 수백 명의 병력만을 남겨둔 채 쟈 딘 성을 공격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은 결국 1859년 2월 쟈 딘 성 인근 지역을 점령하고 근거지를 다 낭에서 그 곳으로 옮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불리해지고 내란까지 겹치자 뜨 득 황제는 협상을 결심한다. 결국 뜨 득 황제와 나폴레옹 3세 사이에 최종적인 서명이 오가면서 조약이 체결되고 프랑스는 베트남의 식민화에 점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사이공 조약을 맺어 이곳에서 포교와 통상의 자유를 획득하고 코친차이나를 빼앗고 통킹을 점령하였다. 또한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청과 프랑스가 대립하여 청-프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서 프랑스는 승리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구성하게 된다.

 

 

2) 베트남의 식민화와 저항운동

후에조는 코친차이나 6성을 상실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개혁의 움직임이 있긴 하였지만 조정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하여 큰 성과를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1883년 8월 아르망과 쿠르베가 다수의 군함과 육군을 이끌고 공격하여 후에를 향해 진격하자 저항이 불가능해진 응우옌 왕조는 휴전을 요창하였고 결국 제1차 후에 조약 또는 계미조약이라고도 불리는 이른바 아르망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에 의하여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대외관계는 프랑스를 통해서만 하기로 약속하였다. 프랑스는 모든 주요 도시에 주차관을 임명하였고 통킹의 베트남 군대는 철수하고 프랑스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베트남인의 저항은 프랑스의 침략과 동시에 시작되었다.지방의 문신들은 의군을 조직하여 관군을 도왔으며 응우옌 딘 찌에우, 판 반 찌, 응우옌 통 같은 인물들은 주로 글을 통해서 프랑스의 협력자들을 공격했다. 프랑스의 군대가 홍 강 델타를 공격할 때에는 북쪽의 신호들도 자위대를 조직하여 저항의 태세를 갖추었다. 조정 또한 근왕운동이라는 이름아래에서 황제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침략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는 조칙을 전국에 반포하였다.

 

조칙은 주로 문신 계층에게 봉기를 호소하는 내용이지만 베트남 각지에서 황제의 호소에 부응하여 지방의 학자와 지주들이 농민을 이끌고 대불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른다.레 닌은 저항세력을 규합하여 성청 소재지를 공격하고 레 쯕은 꽝빈에서, 응에 안 지방에서는 응우옌 쑤언 온이 저항운동을 주도하였다.

 

근왕운동 이후 동경의숙이나 베트남 광복회 같은 단체를 중심으로 베트남은 독립의 돌파구를 찾게 된다. 특히 베트남광복회는 중국의 신해혁명이나 안중근의 이토 히토히로부미 져격 사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단체로 1912년에는 총독이였던 사로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하였고 친프랑스파 척결, 하노이 호텔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많을 활동이 있었다.

 

 

 

 

 

8. 베트남전쟁

1) 남북분단

미국이 동남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갖으면서 제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인도차이나에 대해 신탁통치에 대한 뜻을 밝혔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는 미, 영, 소, 사이에서 배트남내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에는 중국 국민당 군대가, 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한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지고 중국 국민당 정부도 이에 동의했다.

 

 

 

 

포츠담 협정에 따라서 1945년 9월 12일, 남부에는 영국 장군 더글러스 그레이시 지휘 아래 주로 인도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가 도착하고, 거의 같은 시기 북부에는 루한 장군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 정부군이 들어왔다. 이에 앞서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드골은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티에리 다르장리외 제독을 인도차이나 고등 판무관에 임명하고 곧 이어 남부에 장 세딜을, 북쪽에는 장 생트니를 파견했다. 세딜이 사이공에 도착했을 때, 남부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10월에 프랑스군과 호 찌 민 정부 사이에 교섭이 몇 번 있기는 하였지만 타협은 없었다. 호 찌 민 정부는 온전한 독립을 원하였으나 프랑스 대표단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의 분위기상 베트남의 독립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 찌 민은 프랑스 대표인 생트니와도 비밀리에 접촉했다. 처음에 생트니는 현지 미국 해외첩보부와 중국 국민당 군대의 방해로 거의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호찌민으로서는 생트니의 임무가 프랑스 권력의 재확립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이어지는 제네바 협정으로 인한 휴전으로 베트남의 남북분단은 돌이키기 힘들게 되었다. 남북각각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으며 지엠의 하노이측의 남북 총선거 제안을 거절한 후에도 선거도 남부에서만 따로 치르는 등 우리나라와 비슷한 과정을 밟아갔다.

 

2) 베트남전쟁

남부 베트남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대되고 1963년 1월 사이공 서남쪽에 위치한 업 박이란 촌락에서 남베트남 정부군과 베트콩 사이에 최초의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졌다. 병력과 화력의 절대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정부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엠의 독재정치와 부패 등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던 베트남인들 까지 점점 더 민족해방전선쪽으로 기울자 케네디 행붕보는 지엠을 옹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불교도 탄압 등으로 인하여 틱 꽝 득 스님의 분신자살 모습이 생생히 전세계로 전달되면서 국제여론은 지엠 정권의 야만성을 규탄하고 나섰다.

 

지엠과 케네디가 사망한 뒤 미국은 베트남 문제를 직접 떠맡기로 했다. 1963년 존슨 대통령은 미 군사 고문의 수를 증가시켰고 북베트남에 대한 정찰비행과 남베트남 특공대의 북부 해안지대 기습공격 등과 같은 비밀작전을 승인했다. 8월 2일 통킹만에서 순찰 중이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 호가 북베트남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자 존슨은 이를 기회로 즉각 북베트남 해군 기지에 대한 보복공습을 명령했다.

 

존슨의 단호한 의지에 직면한 하노이 정부는 미 지상군이 투입되기 전에 사이공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해 정규군을 신속히 남파했다. 종전 존슨 행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은 미국의 전쟁 확대가 북베트남의 참전을 초래 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최근 연구는 하노이측의 자료를 인용하여 1964년 말까지 북베트남의 정규군 3개 연대 4,500명의 병력이 이미 남부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히고 있다.

 

1965년 7월 존슨은 전쟁의 미국화를 결정하였고 베트남 파병에 대한 국내의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한편, 사이공 정부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확대하는 데도 골몰 하였다.미국의 노력으로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일랜드가 베트남 전쟁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박정희 정부가 자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1965년 2월 하순에는 공병부대와 자체 경비병력으로 구성된 한국군 비둘기부대을 파견하였고, 전투병력은 육군 2개 연대 규모의 맹호부대와 해병 1개 여단 규모의 청룡부대를 편성하여 파병하였다. 이는 훗날 한국의 경제발전에 있어 경제적 문제 해결 및 한국군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

 

하노이 정부의 병력 또한 징병제도를 통해 충분히 공급되었다. 매년 20만명이 징병 연령에 도달했고, 이들 중 상당 수가 1968년 까지 남으로 파견되었다. 1968년 초 남부에 있는 베트콩과 하노이 정부군 수는 30만명으로 비정규군과 합치면 모두 60만명 가까이 되었다. 소련과 중국의 군사원조 역시 하노이 측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호 찌 민 통로를 경유하여 베트콩에 전달 된 소련이나 중국의 무기들이 있었는데 미군은 이 떄문에 호 찌 민 통로에 대한 집중적 공습을 감행하였다. 허나 큰 효과는 보지 못 하였다. 하노이 정부가 수십만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이 통로의 보수와 유지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은 병력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였으나 워싱턴은 전쟁의 승리에 대한 환상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베트콩의 뗏 공세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뗏은 베트남에서 굉장히 큰 명절인데 이전에는 뗏을 전후하여 2주일 가량 휴전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베트콩과 하노이 정규군은 남베트남의 거의 모든 도시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면적인 공격을 미군은 막아내어 전술적인 승리는 얻었지만 미국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베트남 정책에 대해 지지도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국내외 정세가 사이공 정부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1973년 11월 미국 의회가 미군의 해외파병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미국의 재개입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미국의 재개입이 불가능함을 확인한 하노이 정부는 1975년 1월 전면전에 돌입하고 4월부터 사이공 점령을 위한 하노이 정부의 마지막이자 최대의 공세인 ‘호 찌 민 작전’이 개시 되었다. 이때 사이공은 대혼란에 빠졌으며 사이공 정부의 중요 인사와 가족들은 해외로 철수 하였고 4월 30일 마침내 사이공마저 하노이 군대에 점령됨에 따라 베트남 공화국은 종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5년 봄에 공산당이 베트남에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베트남이 마침내 공산화가 되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끝났으며 한동안 남베트남이 형식상 독립 국가로 남아있었지만, 공산당이 지도하고 있었고 하노이의 지도자들이 사실상의 권력자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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